[중부시론] 최용현 변호사·공증인

모국인 영국에 맞서 싸워 독립을 쟁취한 신생 미국은, 국왕과 총독이 사라진 정치적 무(無)의 상태에서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머리를 맞대고 향후 어떠한 헌정(憲政)질서를 갖는 것이 정의롭고 바람직한가 고민하고 토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그들은 인류 최초로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것을 채택했다.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성'과 '책임성'을 핵심으로 한다. 정치적 대표는 직접이든 간접이든 시민의 선택에 의해야 하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표성의 원리는 시민의 선택이라는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미국 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의회는 시민의 정확한 축소판, 초상화가 되어야 한다"고 했고, 미국 민주주의의 최고의 설계자이자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은 "의회는 사회전체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했다. 대표성의 원리는 단순히 대표나 선거 여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례하게' 대표해야 한다는 정의(正義)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특정한 계급이나 집단이 아예 대표되지 않거나 과소대표 된다면, 역으로 어떤 특정 부류가 과잉대표 되거나 이중대표 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

선거제도를 핵심으로 하는 현대 대의민주주의는 이러한 '비례적' 대표성 이라는 정치적 정의를 본질적으로 무시하고 위배한다. 현재의 선거제도 하에서 정치엘리트 자리는 거의 모두 부유층, 엘리트, 관료 출신들이 독차지하고, 그에 따라 정치는 상층계급과 기업 편향적으로 운영되고, 정치권력의 기업권력과의 유착이나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 일반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투표 불참 등의 폐해를 피할 수 없다. 가진 자나 출세한 자들은 과잉대표 되고, 가난한 서민이나 노동자, 수많은(분산된 소수자들을 모두 합치면 대표되는 다수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소수자들을 아예 혹은 거의 대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선거제도 그 자체의 본성이다.

그렇다고 선거제도를 걷어찰 수는 없다.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SNS민주주의, 시민추첨의회 등 여러 대안이 등장하고 있으나, 현행의 선거제도를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나 민주정치 정의의 복원을 위하여, 적어도 현행 선거제도의 불비례성만큼은 시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법 개정 논의는 바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지난 2016년 20대 총선에서 양대 거대정당인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지지율 34%, 26%를 훨씬 넘은 의석수 122석(41%), 123석(41%)을 얻은 반면, 국민의당은 민주당보다 더 많은 지지(27%)를 받았음에도 민주당보다 훨씬 적은 28석(13%)을, 정의당은 지지율(7%)의 1/3정도의 의석수(6석)만 확보했던 것이다. 20대 총선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우 매번 총선에서 지역정당체계, 소선거구제하에서의 제2당효과(지역구에서 제2당이 반대표를 독점하는 현상), 비례대표제도의 한계 등으로, 민주주의가 의심받을 정도의 막대한 사표와 불비례적 결과를 받아든 것이다. 정당지지도와 의석수간의 불비례성 정도에서, 비례대표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유럽이 5%미만인 반면 우리의 경우는 그 4배(20% 이상)가 넘었다. 심지어 우리의 경우는 비례대표제도 자체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미국의 경우(10% 정도)보다 높았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의회는 시민사회를 닮아야 한다, 소외된 계층과 부문도 정치적으로 대표되어야 한다, 현행 선거제도의 민의의 왜곡은 시정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구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정의를 위해 시민들이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보다 더 관심을 갖고 그에 적극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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