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충청취재본부장

현재 우리 언론은 의사소통에 성공하고 있는가? 언론이 글자와 말 등 기호(記號)를 통해 의도하는 바를 대중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무척이나 부족한 면이 많다. 언론 역할과 기능은 기호와 대중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느냐의 여부에 있다. 이럼에도 우리 언론이 의사소통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언론은 그런 기능과 책임을 저버리고 있다는 말인가? 분명한 것은 의사소통에 실패한 언론은 삶의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기호학(記號學, semiology, semiotics)이란 학문이 있다.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글자(예 한글), 말(글자의 발음)과 글자가 아닌 말(헛기침-존재 고지), 비언어적 표시(별-군대 장성, 적색 신호-정지), 몸짓(손사래-어떤 말이나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에게 조용히 하라고 할 때 손을 펴서 휘젓는 일), 그림과 사진 등 기호를 지배하는 법칙과 이 법칙이 다수인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어 상호 이해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생각이나 의도를 담아 제공한 기호를 받아들여 이해하고 판단하다. 이처럼 상대방 의도가 담긴 기호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 한다. 물론 기호에 의도나 의미를 담는 행위 역시 의미작용이다. 여하튼 나름대로 그 기호에 대한 의미작용이 끝났다면 행동에 들어간다. 이는 의사소통이 성공한 셈이다. 기호와 의미작용은 시공간과 관계없이 상호 작동한다. 기호는 '의미(message)'를 부여하고,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읽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작동을 '기호작용(semiosis)'이라 한다. 그러니까 기호는 의사소통의 도구다. 따라서 기호가 없다면 인간들의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언론은 주로 문자와 말의 기호로 대중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언론이 사회현상을 담아 놓은 '글자와 말'은, 기호학자 소쉬르의 주장을 빌리자면, 기표(記表, significant)이고, 이 기표(신문의 글과 방송의 말)에 담아 놓은 메시지는 기의(記意, signifier)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기표 속에 담긴 기의 이해에 성공하면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 셈이다.

우리 언론이 의사소통에 성공했다고 방점을 찍지 못한다는 서두의 주장 근거가 여기에 있다. 언론과 대중의 상호 의미작용이 실패했다는 점이다. 의미작용의 실패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언론이 올바른 기표, 표현력과 구사(驅使)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대중 역시 기호의 기의 파악을 애써 하지 않았거나 아예 해석을 거부한 데 따른다.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김동우 YTN청주지국장

글과 말이 단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양쪽 모두의 의미작용 실패가 우리 언론의 현주소라는 점은 분명하다. 물론 말과 글의 다의성은 언론과 대중의 의미작용을 다양하고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점 또한 확실하다. 하지만 우리 언론은 예외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논지(論旨)의 다양성과 언론의 다수에도 '언론이 천편일률적이다'라는 비난을 벗어나기 힘든 지경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에 빠진 언론들은 '글과 말, 기호는 자본으로 이어진다.'라는 논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기표와 기의 사이 의미작용, 즉 대중들이 편견과 선입견의 탈을 벗어 놓고 객관적 글과 말을 가감 없이 읽어내야 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무한경쟁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로 언론을 내몰고 있다. 이런 언론은 '죽음의 침대(Procrustean bed)'를 만든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라는 노상강도의 신과 다르지 않다. 모든 잣대는 언론사 꼴리는 대로다. 이러니 어떻게 의사소통의 성공을 바라겠는가? 어림도 없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