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테이블에 예쁘장한 돌이 놓여 있다. 작은 글씨로 끽다거(喫茶去)라고 석각이 되어 있다. 체류하고 있는 문학의 집의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그 돌을 바라보고 있다. '차 한 잔 들고 가게나'의 뜻으로 당나라의 조주 선사가 한 말이다. 멋진 화두를 감상하는 사이 작가 한분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획 하나가 비어 있어 아쉽네요"

나는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잘 보라고 해서 봤더니 과연 한 획이 빠져 있었다. 끽을 파자하면 도(刀-칼이라는 뜻)가 들어 있는데 그 도의 가운데의 획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죠. 한 분 한 분 그 빠진 획이 되세요. 입주 작가님들. 그래서 칼도 이루시고 차(茶)도 이루세요."라고 말하자 그는 '빙고!'하는 듯한 미소로 반응해 주었다.

내가 한 말은 무의식 깊은 곳에서 나오고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십년 남짓 전이었다. 술집에서 우연히 무술의 고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는데 합석해 술을 마셨다. 그의 말은 예리한 면이 있었다. 나도 뒤질세라 순간순간 반응을 보였다. 대화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하나만은 뚜렷하다

"자넨 칼일세. 그런데 향이 없어."

그 말은 나의 평생 화두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정확히 짚은 것이다. 확실히 어떤 세계의 정점에 도달하면 다른 세계는 가지 않고서도 보이는 모양이다. 난 글이 좋아 줄기차게 글을 써오면서도 그가 짚었듯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직관이 강하다는 말은 꽤 들어왔다. 그러나 문체가 약하다는 말도 들어왔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획 하나 빠진 끽다거를 두고 한 말. '한분 한 분 그 획이 되세요. 그래서 칼도 이루시고 차도 이루세요'. 그 말은 그런 단점, 그에 따른 아픔, 초극하려는 몸부림이 버무려진 것 외에 그것들을 뚫고 나온 시원한 분수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그 이상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물론 그 둘로 나누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 사람은 실제로 다양한 잠재력의 총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은 장점과 단점의 이분적 분화를 애초 넘어선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론 장점과 단점으로 드러나기도 하니 그 층위에 맞춰 썰을 풀어보자.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장점을 강화하고 단점을 극복하라는 말이 있다. 단점 극복이 대단히 어려움은 경험적으로 안다. 단점에 신경 쓰지 말고 장점만 강화하자는 말도 있다.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에 대해선 그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 자체가 차단되는 면이 있다. 나는 장점 찬양주의자는 아니다. 단점에 어마어마한 천연 자원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단점은 내게 극복이나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대상이다. 단점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장점에 들어 있는 것과는 다른 색채의 자아가 열린다.

단점을 연주하라. 난 그렇게 말하고 싶다. 장점 위주로 강화해서 최고가 되는 것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허구한 날 소모적 에너지를 쓰라는 말도 아니다. 단점 내지 취약점은 장점에 대한 들러리나 그늘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찰 및 통찰에 무게 중심을 두는 사람이라면 단점을 연주하는 가치와 눈부심을 알 것이다. 한 획이 빠진 끽다거 돌은 바로 그로 인해 내겐 오랜 시간의 두께를 뚫고 과거의 섬뜩한 직면의 시간과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그때의 미흡을 순식간에 보강해주는 이상으로 넘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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