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타인의 일상적이지 않은 민·형사 사건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것이 필자의 직업이다. 그런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파헤쳐 가다 그 궁극에 도달해 보면 인간 본성의 사악함이라던가, 부도덕이라던가 하는 거창한 악의 축이 기괴한 모습으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낼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은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은 대부분 맥 빠지게도(?) 그런 거창한 사연이 숨어있기보다는 부주의, 경솔, 개인적인 욕심같은 어찌보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흠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작은 인간적 흠결에 어쩌다보니 개인적인 불운이 겹치게 되고, 아주 공교로운 타이밍에 예기치 않은 부정적 결과가 도드라지게 되면서 민사사건이 되어 돈을 잃기도 하고, 심할 경우 형사사건이 되어 교도소 담장을 위태롭게 걷는 일이 생기곤 한다.

부주의나 게으름 같은 것에서 비롯된 부정적 결과에 대하여는 사회적 평가가 대체로 '나쁜 것'으로 일정하다. 하지만 욕심은 딱히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어 참 난해하다. 욕심이 성공한 경우 욕심은 야망으로 치장되어 성공의 밑거름으로 칭찬받고, 잘못되면 패가망신하는 그릇된 욕망으로 사회적으로 지탄받기 쉽상이다.

누군가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지라고 가르치기도 하고, 누군가는 소탐대실하지 말라고 한다. 욕심을 가져야 하는 것인지, 가져서는 안되는 것인지. 가져야 한다면 어디까지가 권장되는 야망이고, 어디까지가 비판받는 그릇된 욕망인지 경계도 불분명하다.

욕심과 관련한 교각살우라는 고사성어만 가지고 생각해 보아도 뿔이 비뚤어져 있는 황소를 보고 가만히 두면 잘못된 현실에 대한 개선의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비뚤어진 뿔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한다면 소를 죽일 수 있는 경솔함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욕심이 아주 추상적인 개념인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숫자로 계산되는 내안의 욕심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타던 차를 팔고 새로운 차를 구입하고자 할 때, 내가 팔고자 하는 가격은 항상 시장가격보다 조금 낮고 사고자 하는 가격은 항상 조금씩 높다. 내가 원하는 월급은 실제로 받은 월급에 항상 덜 미친다. 그 차액. 그것이 바로 수치로 계량되어 확인할 수 있는 욕심의 크기이고, 그 차이를 줄이는 것이 능력이다.

법에도 게으름이나 경솔함에 대하여는 단지 '그러지 말라'는 수준의 추상화된 선언만 있고 사후적으로 평가할 뿐이다. 하지만, 유독 욕심에 대하여는 구체적 선을 제시한다. 노동에 대한 최저시급, 이자율같이 정확한 선을 그어 객관화하고 이를 넘으면 위법으로 간주한다. 욕심에 대한 법률적 경계가 언제나 옳은 것인지 알 길도 없다.

생각해보면 덧없는 욕심으로 보였던 무모한 시도가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예는 수없이 많다.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려하다 실수로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대항해 욕심이 그러하고, 인간은 하늘을 날수 없다고 여기던 당시의 라이트형제가 가졌던 비행에 대한 욕망이 그러하다. 요즘 법에 비추어 콜럼버스나 라이트형제가 그들의 욕심을 실현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 모았다면, 어쩌면 성공에 이르기 전에 이미 사람들을 기망하여 거액의 돈을 편취하였다며 사기죄로 처벌되었을 수도 있다.

기성세대는 요즈음 청년들은 모험정신이 없다고 비난한다. 과연 그들이 모험정신(욕심)이 없는 것일까. 그들이 성장하면서 가졌던 욕심을 소탐대실 한다며 혹은 교각살우 한다며 꼰대정신으로 찍어 누르지 않았는지 우리 사회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황소 뿔이 잘못되었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바로잡으려는 욕심이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욕심의 결과로 곤란에 처해질 때 그 욕심의 적법성을 변호하기 위해 변호사가 존재한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그것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사회가 요구하는 변호사의 역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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