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중국 제(齊)나라의 왕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정치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정명론(正名論)을 설명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이 경구는 공자로부터 비롯되었다. 맹자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군가 자기의 자리에 요구되어지는 '다움'을 잃었을 경우 그를 그 자리에서 내려뜨리고 '다움'을 가진 다른 이로 변경시킬 수 있다는 혁명론을 제기하였다고 한다.

공자와 맹자의 이런 견해는 단지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자식을 콕 찝어서 그들의 '다움'만을 강조한 말은 아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면서 어떤 일을 담당하든 그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직분의 '다움'은 시대가 공감하는 명분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왜 명분이 중요한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한다.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올바르지 못하고, 말이 올바르지 못하면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작게는 명분을 찾아 개인간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거나, 심하면 국가간 전쟁의 원인이 되곤 한다.

몇 해 전 우리의 정치상황은 대통령이 대통령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수사를 통해 밝혀진 진실은 소문만으로 들리던 이야기보다 더 황당했다. 결국 '다움'을 잃은 대통령과 신하들에게 명분이 없어졌다며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었다.

국민의 저항이라는 치열한 가치를 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촛불로 표현한 것은 역설적이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거리에 촘촘히 박혀 어둠을 밝혔던 촛불이라는 상징이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정도였다.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명물은 남대문이나 남산타워같은 것이 아니라 감성 충만한 밤거리의 촛불로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될 정도이다.

강산이 바뀌려면 10년이 걸린다는데, 감성적으로 강했지만 바람 앞에 흔들리는 촛불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작은 존재만으로도 큰 의미를 담았던 촛불이라는 상징은 이제 그 갯수가 중요한 명분의 지표로 퇴색되었다. 한심하게도 서로의 명분의 크기를 촛불의 갯수로 배틀을 벌이고 있다. 지금처럼 양으로 명분을 설명하는 촛불은 어둠과 추위를 견디며 민주적 열망을 상징하던 지난 겨울 밤 강렬했던 촛불과 전혀 다른 촛불이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현대 한국 정치현실에 비추어 바꿔보며 '장장총총(長長總總)'이라 할 수 있겠다. 장관은 장관의 일을 하면 되고, 총장은 총장의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이것이 임명권자가 논란을 딛고 조국 교수를 법무장관에 임명한 이유였다. 밝혀지지 않은 의혹은 의혹에 불과하고 수사를 통해 밝혀지면 될 일이라면서 장관은 장관의 일을 하면 된다고 호기롭게 검찰 개혁의 칼을 뽑아든 조국 전장관의 갑작스런 사의는 '장장총총'의 촛불을 흔들어 꺼버릴 수 있는 강풍이 되었다.

현 검찰총장이 걸어온 길이나, 주변 평가에 따르면 그는 그냥 검사다. 가치판단 없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는 무덤덤한 검사. 대통령도 그런 성향을 알고 그를 검찰총장에 임명했으리라. 조국 전장관이 사퇴를 통해 '장장'(長長)의 명분이 사라진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이른바 조국사태로 악화된 국민간의 소통에 힘쓰고, '장장'의 역할을 할 균형있고 강력한 법무부장관을 지명하여 군군(君君)의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정파적 이득만을 위해 특정 계층을 자신의 촛불 거수기로 삼으려고 선동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은 여전히 한심하다. '다움'을 밝히는 빛이 한 개면 어떠랴. 하나의 태양은 수백억 개의 별빛을 가린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탄핵촛불의 향수를 떠올리며 촛불을 모으기보다, 태양을 보여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