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본질과 존재의 의미에 관한 독일의 작가 F.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는 잠에서 깨어 자신이 한 마리 징그러운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잠자의 가족들은 그의 기괴한 몰골에 놀랐지만 여전히 가족이라는 본질을 외면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한다. 하지만 잠자는 가족으로부터 한 마리 벌레라는 존재로 인식되어 갔고 결국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썩은 사과를 맞고 죽음에 이른다.

이 작품에 대한 여러 평론이 존재하고 여러 해석이 있다고 한다지만, 적어도 잠자의 인간이라는 본질과 벌레라는 존재 사이의 괴리가 이 소설을 이끄는 주된 장치임은 확실하다. 본질과 존재. 다분히 철학적인 이 개념은 교과서를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어려운 실존주의 철학의 주요 개념이다. 본질과 존재라는 용어는 어렵기도 하고 딱히 먹고 사는 문제와 하등의 관계없어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본질과 존재는 사람들 간에 논쟁이나 결론이 어찌될지 애매한 많은 법적 분쟁에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매우 실질적인 것이다.

실제로 견해를 달리하는 패널이 나와 입씨름하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팩트' 운운하며 치열하게 다투지만, '팩트'를 체크한 것만으로는 논쟁이 끝나지 않는다. 이후에는 확인된 '팩트'를 본질적 측면에서 다가갈 것인지, 현상하고 있는 '존재'를 중시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인지로 의견이 또다시 나뉘고는 한다.

결국 세상사 대부분의 논쟁의 중심은 본질과 존재에 관한 다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F.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가 된 잠자(Samsa)를 죽인 아버지의 행위에 관하여서도 본질과 존재에 관한 시각에 따라 상이한 두 가지 법적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

아마 검찰은 잠자는 음악 선율에 이끌리기도 하고, 가족을 걱정하는 등 본질적으로 전과 다름없는 인간이므로 잠자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인죄로 의율하고자 할 것이다. 변호사는 존재의 시각에서 잠자는 누가 봐도 이미 벌레였기 때문에 그저 벌레를 죽였을 뿐인 아버지를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변론할 것이다.

동일한 사실관계 속의 본질과 존재의 문제는 형법 250조에 따른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 혹은 무죄라는 커다린 차이를 만든다. 돈이 얽혀있고 정교한 법리가 발달해 있는 민사 책임의 영역에서는 이보다 더 복잡한 법률관계를 파생시킨다.

필자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본격 법정 SF소설을 써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가까운 미래 인간의 신체 일부분, 즉 장기나 팔다리를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가 있는데, 그 회사는 영혼을 다운로드 할 수 있는 뇌를 개발하였고 사망 직전의 사람이 회사에서 만든 인공 뇌에 영혼을 집어넣고 그 뇌에 신체를 붙여 넣는 것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은 이식받은 제품을 물건으로 생각하여 회사 AS센타에서 수리했다가 의사들로부터 고소당하여 의료법 위반 재판을 받는 에프소드, 이식받은 몸에 문제가 생겼는데 회사에 대하여 제조물 하자 담보책임 소송을 제기한 에피소드, 누군가가 이식받은 제품을 손상시켰는데 이 때 물건 손괴책임 지는지 혹은 신체에 대한 상해책임을 지는지에 대한 에피소드, 영혼 다운로드를 사망을 보아 상속이 개시되었다며 제기한 상속 소송 에피소드, 몰래 그(혹은 그 물건)를 데려가서 약취유인으로 기소되었으나 피고인이 단순 절도임을 주장하는 에피소드 등이다.

본질과 존재에 관한 시각 차에서 오는 갈등이 소설속 가상의 재판에만 있을 법한 황당한 이야기일까? 우리 실생활에서도 본질과 존재의 괴리가 있어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을 내리기 애매한 경우가 이미 우리 주변에 많다.

권택인 변호사
권택인 변호사

일제 강점기 시절 반민족 행위를 한 누군가가 해방이후 혼란기 사회 안정에 공을 세운 존재가 되었다면 우리 사회가 그를 애국선열로 예우하여야 한다는 말. 정경유착으로 쌓아올린 부가 현재 나라 경제에 큰 도움이 되니 국가차원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말. 누군가는 지금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지 않느냐 하고, 누군가는 똥의 냄새를 제거하고 예쁜 용기에 담아둔다면 먹을 수 있겠냐며 핏대를 세운다. 둘 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본질을 따질 것인가. 아니면 본질을 감싸고 있는 존재를 따질 것인가. 이래저래 본질은 참으로 가벼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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