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삽상한 가을바람이 상쾌함을 더하는 요즈음 발길이 무심천 둔치를 향한다. 갈색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며 서걱거리는 소리는 추억을 소환해 이곳을 '무심천 가을 역'으로 명명했다.

그날은 미국에 가서 10여 년을 만나지 못한 친구가 오는 날이라 고교 동창 일곱 명이 함께 모이기로 했다. 한반도의 중심이랄 수 있는 이곳으로 오기로 해서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어디쯤 왔을까 들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세월은 고맙게도 여고시절 모습에 연륜만 살짝 얹어 반가운 마음에 얼싸안았다.

청주에 아름다운 곳도 많지만 소녀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갈대와 억새꽃이 어우러진 무심천으로 안내했다. 꿈 많던 10대 때 이야기로 시작해 을숙도의 황새를 쫓아가다 갈대밭에 넘어진 이야기를 할 때는 꼭 사춘기 소녀들을 보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 온 친구는 좋은 소식보다 정치인들 싸우는 이야기며 비리공화국이나 되는 것처럼 연일 터지는 비자금 사건들을 접할 때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고 한다.

부산의 친구도 그곳 사람들은 별 노력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최선을 다한 자기보다 월등하고 단합도 잘해서 역부족을 느낀다고 했다.

"우정은 산길과도 같아서 자주 오고 가지 않으면 초목이 우거져서 길은 이내 없어진다."라는 구절이 있지만 우리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억새를 갈대로 알던 소녀 시절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해서 여자와 갈대를 동일시했다. 여린 것을 은근히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시켰는데 이제는 외유내강의 대명사를 갈대라 해야겠다. 부러질 듯 긴 허리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기상관측 사상 가장 피해 규모가 컸다는 태풍이 지나갔어도 그네들은 건장하지 않은가.

'우'하는 소리를 내며 줄지어 휘어지며 쓰러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하니 이보다 더 지혜로운 처세가 어디 있으랴. '승리를 유지하는 사람은 강하면서 약한 것 같이 행동한다.'라는 열자(列子)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눈길을 끄는 화려함이나 예쁜 꽃잎은 없지만 첫눈이 와도 변치 않고 잡아끄는 은은한 수수함과 강인함이 이들의 매력이다. 청춘의 끓는 사랑은 아니어도 평생을 같이한 부부의 끈끈한 정 같음이 나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괜한 욕망이 꿈틀거리거나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언짢을 때 무심천 가을 역은 그리운 얼굴들의 미소를 보여주며 다독인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무심천은 비울 때 채워지는 진리를 보여주듯 유유히 흐르며, 사운 대지만 이내 바로 서는 갈대의 지혜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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