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유재풍 변호사

시월 끝자락에 지리산 천왕봉에 다녀왔다. 평소 주말산행을 같이 하는 친구 중 하나가 아직 못 가봤다고 해서 11년 만에 간 것이다. 사실은 좀 걱정되었다. 예전 노고단에서 중산리에 이르는 1박 2일 34㎞ 종주를 하면서 느꼈던 고통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집에서 산행출발지 중산리까지 세 시간 가까운 운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친구의 첫 등정에 나도 함께하고 싶었다. 비슷한 난이도인 설악산의 경우 근래 해마다 한 번씩 정상인 대청봉에 올랐는데, 지리산은 작년 가을 피앗골을 거쳐 임걸령까지 다녀온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가장 짧은 중산리 15㎞ 길을 택했다.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서서 7시 반부터 등산을 시작해 오후 3시 반까지 8시간 걸렸다. 돌길과 바윗길을 걸었던 까닭에 무릎도 아프고 몸도 피곤했다. 그러나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1915m)을 다녀왔다는 성취감을 맛보았다.

등산길에서 만난 수많은 인파가 나를 놀라게 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 7㎞ 등산로를 거의 메우다시피 많은 이들이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주로 청년들이 많았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많았다. 초·중학교 학생인듯한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들도 보였다. 외국인들도 다수 보였다. 거기에서 희망을 보았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해외여행은 물론 대규모 군중이 모이는 운동경기 관람이나 단체 관광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런 중에 가족끼리 친구끼리 삼삼오오 산을 찾아 자연을 즐기는 것이 귀해 보였다. 그것도 어렵기로 소문난 지리산 천왕봉을 찾은 모습이. 등산길은 바윗길과 돌길, 가파른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그것도 젊은이들이, 아무나 나서기 힘든 산에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네 시간 가까이 걸려 정상부근에 도착했다. 정상 표지석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으려고 대기하던 많은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정상 200~300m 앞에 이르니 먼저 도착한 이들이 줄줄이 서서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왕봉에 오른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대기하는 것이었다. 줄을 둘러보니, 족히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할 듯싶었다. 작년 이맘때 한라산 백록담과 유사했다. 가히 기록문화유산이 뛰어난 민족의 후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나와 일행은 이를 포기했다. 날씨가 추워서 도저히 기다릴 수도 없었다. 몰아치는 찬 바람과 날리는 눈발이 한겨울을 방불케 했다. 산 아래는 따뜻한 가을인데, 정상은 이미 겨울인 것이 놀라웠다. 전날 내린 눈이 나무에 얼어붙어 눈꽃을 만들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려다본 산 아래 풍경은 맑은 날씨 덕에 남해가 보일 정도였다. 전에 올랐을 때는 뿌옇게만 보이던 산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니, 국토의 지붕인 지리산 천왕봉에 힘들게 오른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산길은 왔던 길을 약간 달리해서 장터목 쪽을 택했다. 하산길 초입이 경사가 급하고 응달진 곳이어서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너무 미끄러워 혼났다. 그렇지만 장터목을 지난 뒤에는 흙이 많은 계곡길이어서, 올라갈 때보다는 다소 편했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과 그 주변의 멋진 단풍이 가을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더 많은 단풍이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오후의 가을 햇빛을 받아 빛나던 단풍의 아름다움은 내 빈약한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유재풍 변호사
유재풍 변호사

남겨두고 싶어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본 것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다. 산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아무리 카메라 성능이 좋아도 그때의 느낌은 물론, 눈으로 보는 것을 다 담을 수 없다. 찬란한 오후의 햇살을 받아 빛나던 산 아래 주차장 동쪽 사면의 아름다운 풍경 또한 나를 놀라게 했으니, 11년 만의 재회가 여러 가지로 놀라게 한 것 같다.

다녀와서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수많은 인파에 놀라고, 정상의 한겨울 날씨에 놀라고, 계곡의 아름다운 단풍에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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