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대개의 남자들은 대학 입시 혹은 취직자리를 알아보다 성인이 되어 이제 자유를 누려보는가 하는 딱 좋은 그 시점에 군대를 간다. 병역은 징역과 함께 국법이 정한 2대 역(役) 중 하나이고 역(役)은 신체적 자유의 구속이나 강제노동을 의미한다.

필자 역시 법으로 허용된 국가의 부름에 항거하지 못하고(항거하면 범죄...), 가축보다 조금 나은 대우를 받으면서(들리는 말에 따르면 군견보다 계급이 낮다고 하니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끈질기게 버텼고 성공한 줄 알았다. 첫 휴가를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첫 휴가를 나와서 거리를 걷는데 어디선가 흥겨운 댄스음악이 흘러나왔다. 어깨춤이 들썩거릴 줄 알았다. 하지만, 입에서 침이 흘렀을 뿐이다. 그 곡은 병영에서 식사 시간마다 틀어주었던 유행가였다. 익숙한 유행가의 아름다운 선율 앞에 가사를 음미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없었다. 다만 먹이를 받기 전에 들려주던 소리에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만 있었다.

철학 수업시간에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어서 그 의지가 인간을 존엄하게 만들어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하며 이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배웠고, 이를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개인이 거스르기 어려운 환경속에 노출되어 끊임없이 특정 자극을 받으면 거기에 동물적 반응이 나타날 뿐이었고, 거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일반적으로 군대생활이 힘든 이유는 신체적 자유의 속박 때문만은 아니다. 필자의 경우에는 끊임없는 단순함의 반복에 노출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그것에 익숙해져가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스스로 느끼지 못한 사이에 그 반복이 목적한 인간형으로 변해있던 필자를 확인한 것이 생애 가장 놀랍고 불쾌한 경험이었다.

칸트는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게 존엄을 부여하는 것이 자율이며, 인간은 자율에 의한 의지의 자기입법에 의해서 '목적 그 자체'이고 그런 한도에서 인간은 존엄하여 수단으로서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찾고 있으니 칸트의 시각에서도 필자의 불쾌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말로 선전ㆍ선동으로 번역되는 프로파간다는 내 안에서 생성된 신념, 의지나 자율이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으로부터 조작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뇌같은 프로파간다는 목적의 정당성이나 수단의 적절성과 상관없이 그 대상이 된 개인의 인간의 존엄에 상처를 준다.

그뿐이랴. 악의에 찬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사회 전체의 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양질변화의 시점을 지나면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되곤 한다. 괴벨스의 프로파간다에 휘둘려 하일 히틀러를 외치던 나치시절의 독일이나 주체사상에 세뇌되어 수령님의 은혜를 말하며 눈물 흘리는 북한의 모습이 정확한 예이다.

괴벨스는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 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 '적에 맞서려면 무엇보다 대중들의 한없는 증오를 활용해야 한다.',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의 적절한 배합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등의 말로 프로파간다에 대하여 설명한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요즈음 우리나라에 괴벨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국민을 편나누어 서로 증오하게 만들고,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소수에 대한 차별에도 거리낌 없는 모습이다. 위민하는 정치는 찾기 어렵고 정치공학에 익숙한 유사 정치인들이 괴벨스적 프로파간다에만 치중하며 마타도어를 남발하고 있다.

그들은 거짓과 진실이 적절히 배합된 SNS 컨텐츠로 국민을 자극하며 선동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극에 동물적으로 반응하고 살 것인가. 칸트가 말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대응하며 살 것인가. 우리의 능력은 계속 시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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