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갈무리하고 텅 빈 들녘, 추수 끝난 들판에 십이월의 시린 바람이 분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멍하니 빈 들판을 바라본다. 황량한 논에는 벼 벤 자국이 줄지어 흔적을 남기고 군데군데 파인 웅덩이로 살얼음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겨울의 저 들판은 멈춘 것이 아니라 봄여름 가을을 위한 쉼표. 침묵의 시간이자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코로나19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마스크는 일상화되었고, 사람을 만나면 반가움보다는 피하고 보는 세상이 되었다.

내게도 쉼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큰 병이 갑자기 왔다. 혹시나 오진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검사를 받으면서도 앞으로 닥칠 운명에 살얼음 걷듯 마음 또한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서울에 있는 병원을 오고 가는데 터미널이나 버스, 병원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아 불안하다. 살얼음 위를 걷듯 마스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입원하는 날, 갑자기 보호자도 코로나검사 음성이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여동생이 같이 들어가려다가 발이 멈추었다. 5인실 병동에는 보호자가 한 명도 없었다. 갑자기 바뀐 정책으로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다. 이튿날 보호자들이 도착했고 환자와 똑같이 병동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병을 치료하러 왔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잘 때도 마스크를 해야 했다.

보름 동안 전신마취하고 두 번의 수술을 했다. 폭설과 매서운 추위 속에 치료하러 다니며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주나 화가 났다. 입원실에는 눈, 척추, 목 갖가지 부위에 이상이 생겨 치료받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 나는 나은 편이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건강한 두 발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한지, 살얼음이 끼려던 마음을 거두었다.

겨울이란 계절은 우리를 가두어 놓는다. 매서운 한파로, 바이러스로 발길을 멈추게 한다. 힘들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걸어가듯 아슬아슬하다. 혹한의 시절이지만 삶은 겨울을 무사히 견딜 것이다.

인생도 계절과 같아서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자연의 시간 속에 영원한 것은 없다. 오로지 순환이라는 거대한 시간이 존재한다. 제행무상, 자연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고 순환하며 어김없이 때를 찾아서 돈다. 혹독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을 보내고 있는 내게, 또는 그대에게 따스한 봄은 꼭 오리라 이야기해 주고 싶다.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거름, 강은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했으니 이제는 가장자리부터 녹을 테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이제 하늘길에 뻗은 우듬지 움트고 자세히 눈여겨보면 들판에도 꽃다지, 냉이꽃 납작 엎드려 피리라. 가지마다 꽃망울들이 터질 듯 부풀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서서히 만든 나무의 겨울눈은 봄이 되면 꽃을 피우고 새싹이 된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이제 산야는 꽃물결로 일렁일렁하리라. 겨우내 살얼음이었던 내 마음에도 따스한 봄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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