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도편수의 작업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각종 목재들과 전기톱을 포함한 목공 도구들, 톱밥들이 널려 있었다. 먹통도 놓여 있었다. 몇 십년 만에 보는 것이라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먹통과 먹칼예요. 먹칼의 한쪽은 칼처럼 되어 있고 반대쪽은 붓처럼 되어 있어요."

먹통만 알던 내게 새로운 세계가 와락 열리는 기분이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부조리나 폭력에 대해 인문적인 글이 강하다는 뜻이다. 펜다운 펜을 만나기 쉽지 않지만 말이다.

펜의 동양적 변용이 붓일텐데 이런 문장이 있다, '좋은 칼은 칼날을 누르면 휘었다가 놓으면 처음처럼 곧게 돌아온다. 이를 회성(回性)이라고 한다. 붓끝도 이와 같아야 한다.'

'속서보'에 나오는 문장으로 서유구 선생이 '임원경제지'에 인용하고 있다. 펜이나 붓은 통상 칼과 대립되어 쓰인다. '속서보'의 저 문장으로 그 대립이 무너지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먹칼에선 칼과 붓이 아예 한 몸이 아닌가.

"배흘림 기둥엔 먹줄을 360번 치지요"

도편수의 그 말은 이미 매료된 나를 확연히 먼 지점을 끌고 갔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그 앞에 서서 그 건축물을 떠받치는 배흘림 기둥을 마냥 바라본 적이 있다.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읽으며서 그 좋았던 느낌이 더욱 풍요롭게 고조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저런 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웬만해선 듣기 어려운 말이다. 현장의 고수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목공을 배울 때 먹칼 만드는 법을 처음으로 배워요. 목수가 대나무를 주면 자르고 숫돌로 다듬어 만들죠."

도편수는 그 말도 했다. 먹칼의 한쪽은 먹줄에 먹이 잘 묻도록 먹통 안의 먹솜을 누르는 역할을 한다. 반대쪽은 목재에 필요한 것을 적는 붓의 기능을 한다. 그 먹칼의 도움을 받으며 배흘림 기둥엔 먹줄이 일이백 번도 아니고 무려 360번이나 쳐진다는 것이다.

360은 원을 의미한다. 하늘도 천원지방에 따르면 원이다. 흘림이 없는 기둥이 살림채나 부속채 등에 쓰이는 반면에 배 부분이 위와 아래보다 좀더 두터운 배흘림 기둥은 궁궐이나 사찰 같은 특별 건축물에 쓰인다. 신적인 공간으로 볼 수 있기에 360이란 숫자와 걸맞는다.

불평등 의식이 어려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철학이 실체와 정교하게 맞아떨어짐은 사실이다. 극도의 성실성, 치열한 장인 정신, 완벽성, 내공, 밀도가 360번의 먹줄에 배여 있다.

배흘림 기둥은 보통 기둥에 비해 곡선이 가미되어 미학적이다. 특수 상징으로 인한 초월성도 머금고 있다. 그 이면마저 완벽한 밀도로 채워져 있음에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겉만 화려한채 난무하는 모양이 우리 사회의 풍경의 일부를 이룬다. 표리부동, 교언영색, 조삼모사가 판을 치는 바람에 사회 문화가 고유의 미려한 결을 잃은채 피상성과 천박성으로 흐르곤 한다. 집에는 기둥이 필요하다. 배흘림 기둥도 하나의 기둥이다. 집이 견실하게 유지되는 이상의 가치를 발휘하도록 내공과 미학, 상징성 모두 훌륭하다. 기둥 하나에도 그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숙연한 철저함이 배여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집으로 비유하면 기둥, 들보, 기초 공사 모두 부실하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기둥은 지붕을 떠받침은 물론이고 위와 아래를 연결해준다. 인체의 척추에 해당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360번의 먹줄. 우리 사회가 귀감으로 삼아야 할 상징임에 틀림없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