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겨우내 두꺼운 옷 속에 감추어두었던 살이 이젠 옷 밖으로 삐져나와 더이상 방치할 수가 없어서 산행을 시작했다. 말이 거창해 산행이지 사실은 집 뒷산을 가볍게 산책하는 수준이다. 그것도 살을 빼자는 목적은 두 번째이고 그냥 설레설레 봄이 오는 바깥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아파트를 끼고 도로를 삼십 분쯤 걷다가 보면 한적한 과수원 길이 나타난다. 복숭아꽃이 피면 펼쳐질 무릉도원을 그려보며 조붓한 길을 따라 약간 언덕진 길을 올라가면 약수터가 나오게 되어 있다. 약수터 끝자락에는 아담한 이층집이 한 채 있고 그 바깥채에는 '산중선방'이라는 이름이 붙은 별채가 한 채 있다.

그런데 그날 모처럼 찾은 약수터 별채의 광경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산중선방이 있던 자리에 '제비꽃 카페'라는 나무 조각 간판이 아주 조그맣게 걸려있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짝 문을 밀어보았다. 순간 감미로운 음악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꽤 넓은 공간에 벽면 양쪽으로 가득 책이 꽂혀있고 커다란 난로에 아주 적당한 화기의 연탄불이 기분 좋게 타고 있었다. 통나무를 길게 잘라 다듬은 나무 탁자와 의자들이 짜임새 있게 놓여져 있고 빨간색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탁자마다 얌전하게 깔려 있다. 한쪽 구석으로 정리되어있는 주방에는 예쁜 찻잔들과 금방이라도 내려 먹을 수 있도록 갈아놓은 원두커피, 녹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찻잎과 다기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또 아무렇지도 않게 꽂혀있는 것 같지만 한껏 운치를 자아내고 있는 마른 후리지아, 그윽한 향을 풍기며 피어있는 춘란 두어 분까지 결코 작지 않은 공간에 누구의 손길인지 세심하고 꼼꼼한 정성이 눈에 보이는 듯 배어있었다. 일단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아주 오래된 고전에서부터 최근의 시집까지, 근래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소설책들, 수필집들, 문학 잡지들, 다양한 양질의 책들이 꽂혀있는 것도 뜻밖이다.

그런데,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무인 카페였던 것이다. '안전'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들의 삶은 조그마한 기계 덩어리에 지배되어 의식마저도 그것에 종속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얼음처럼 냉정하고 투명한 무인 시스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기적 끈끈함을 해체하고 관계를 단절시키는 괴물의 기계 덩어리가 되어 우리들의 삶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날 참으로 따뜻한 무인의 카페를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책을 읽는 쉼터입니다. 언제든 누구라고 오셔서 독서와 음악을 즐기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찻값은 천 원이며, 이 돈의 이익금은 모두 도서를 구입하는 데 사용될 예정입니다.'라는 안내문과 더불어 작고 예쁜 나무통 하나가 입구에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천원의 찻값이라…, 모든 것들이 금전의 가치로만 계산되고 손익계산으로 치닫는 요즘, 이렇게 근사한 자연 속에 정성껏 찻집을 차려놓고 수익이 맞지 않는 장사를 누가 한단 말인가.

창문을 열면 소나무가 손에 잡힐 듯한 그 찻집에 앉아 천원의 행복을 만끽하며 나는 천천히 녹차 한 잔을 음미했다. 그리고 잇속에 밝지 못한 이 찻집 주인의 의도적 어리석음에 깊이 감사했다. 손익을 따지지 않는 이 집 주인의 따뜻한 모습, 누구의 시름이든 제게 잠시라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제비꽃의 모습을 닮은 듯 하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또한 무인의 시스템이 기계의 냉랭함이 아닌 따뜻한 온기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에 가만히 희망을 가져보았다.

방금 전 누군가가 마시고 간 흔적이 묻어있는 몇 개의 찻잔을 깨끗이 씻어 정리해 놓고 오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봄날의 첫 걸음을 가볍게 떼며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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