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했던 '삼중의 삶'… 예술세계 펼쳐보인 열정의 정수 재조명

[중부매일 이지효 기자]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미술가 우향 박래현(朴崍賢, 1920-1976).

박래현은 한국화단에 선구적 자취를 남긴 여성 미술가로서 판화와 테피스트리를 넘나들며 기존 동양화의 관습을 타파해 나갔지만 50대에 갑자기 타계한 뒤 그의 예술은 점차 잊혀졌고 운보 김기창 화백의 부인으로만 기억됐었다. 여성, 어머니,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토대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완성한 박래현의 삶과 예술세계를 오롯이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작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재조명한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시를 덕수궁에서 종료하고, 오는 5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5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청주는 박래현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박래현의 삶과 예술이 영원한 잠에 든 장소이기 때문이다.

평생 삶과 예술의 여정을 함께 했던 운보 김기창은 박래현과 사별 후에 어머니의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운보의 집'을 짓고 박래현과의 추억을 기리며 여생을 보냈다.

김기창 작 '화가 난 우향' 청주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김기창 작 '화가 난 우향' 청주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미술품수장센터에서 첫 번째로 열리는 근대미술 전시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순회전이지만 청주에서만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도 있다. 김기창이 그린 박래현의 이색적인 초상화 '화가 난 우향'(1960년대)이다.

청각장애를 지닌 유명 화가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 그리고 예술가로서 어느 것도 털어내기 어려웠던 박래현의 '삼중의 삶'을 압축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집안일을 마친 밤 시간에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던 박래현을 김기창은 '부엉이'라고 불렀는데, 늘 깨어있었고, 고단했고, 무척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박래현에 대한 그의 예리하면서도 애정어린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모윤숙 시인은 "확실히 그녀는 과로했다. 아내, 어머니, 예술가의 '삼중의 삶'은 그의 '삼중통역'과 마찬가지로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에 불만은 없었으리라. 누구보다도 내실을 이룬 삶을 살았기에."라며 박래현을 기억했다.

박래현&김기창 작 봄C, 둘이 함께 그린 합작도는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비해, 4폭의 연폭병풍에 그린 이 작품은 보기 드문 큰 규모의 합작도이다.
박래현&김기창 작 봄C, 둘이 함께 그린 합작도는 대부분 소품으로 그린 화조화인데 비해, 4폭의 연폭병풍에 그린 이 작품은 보기 드문 큰 규모의 합작도이다.

'박래현, 삼중통역자' 순회전은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 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구성되며, 청주의 전시공간에 맞추어 압축적으로 전시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박래현의 일생과 예술을 담은 영상을 접하게 된다. 이후 마주하는 작품은 박래현의 '단장'이다.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4학년이던 1943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배경이 없는 큰 화면에 검은색 옷을 입은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 마주 보도록 대담하게 구성하면서도 화장대 위의 화장솔과 소녀의 손 부분에서는 세부 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거울을 바라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앳된 소녀의 표정은 단호해 보이며 무릎을 꿇고 곧게 서 있는 자세는 다부지다. 화가로서의 출발을 준비하던 박래현의 결의가 담긴 듯한 작품이다.

또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노정' 등 전시장 구성은 그의 작품 활동 및 생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도록 했다. 또 전시장 곳곳에 비치된 기고문(수필) 한글 복제본과 문구를 병치시켜 마치 태피스트리의 들실과 날실처럼 엮이고 짜내려가며 박래현의 삶과 예술의 여정을 따라가도록 했다.

한편 전시 기간 중에 2층 쉼터 '틈'에서는 관람객을 위한 연계 프로그램인 8미터의 대형 '태피스트리 제작 워크숍'이 진행된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청주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을 비롯해 지역작가 및 청주시민들과의 호흡을 보다 강화했다"며 "박래현과 김기창의 삶과 예술이 잠든 청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박래현 예술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예약(https://www.kguide.kr/mmca001/) 후 관람 가능하다.
 

☞박래현 작가는

1920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가족이 군산으로 이주해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전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한 뒤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1939년 도쿄로 건너가 이듬해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에 입학했다.

4학년 재학 중에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했고, 시상식을 위해 귀국했다가 김기창을 만나 1947년 결혼했다. 이후 박래현은 1948년부터 1971년까지 김기창과 12회의 부부전을 개최했고 김기창을 비롯한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해 동양화단을 이끌었다. 1956년 '이른 아침'으로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노점'으로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했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미국에 남아 판화를 배웠고, 1974년 귀국해 판화전을 개최하며 판화가로 변신했다. 같은 해에는 훌륭한 예술가이자 모범적인 여성에게 주는 신사임당상을 수상했다.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펼쳤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해 1976년 1월 타계했다. 타계 후 197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우향 박래현초대유작전' 개최와 함께 박래현의 화문집(畵文集) '사랑과 빛의 메아리'가 발간됐고, 1985년에는 중앙갤러리에서 '박래현 예술세계 10주기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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