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언젠가 번역된 것이 아닌 원본으로 동양고전을 읽고 싶었다. 자신 없고 두려워 시도하지 못하다 용기라도 내보자는 마음으로 '논어'와 '도덕경'을 중고 책으로 구입해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준비운동삼아 예전부터 가지고만 있던 만화로 된 '논어'와 '도덕경'을 먼저 읽었다. 전체적인 의미파악으로 어렴풋이 대강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큰 한문과 해설이 있는 세로로 된 '논어'책을 구했지만 '도덕경'은 가로로 된 작은 글씨 책을 구입했다. 공자와 노자가 살았던 시기가 약 2500년 전이라 하면 그의 제자들이 기록했다 해도 2000년은 넉넉히 넘은 글과 책들이다. 그 거대한 시간의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까?

단편적으로 대해왔던 '도덕경'을 통째로 접하니 마음가짐이 새롭다. 한자(漢字)를 본들 무엇을 알까만 한문(漢文)은 더욱 낯선 영역이었다. 먹기 싫은 한약을 의무감으로 복용하듯 조금씩 먹어 보았다. 몇 자 보다가 사탕이나 과일을 집어 들듯 해설로 눈이 간다. 모르는 게 가득해 자주 스마트폰 자전을 켜며 새기는 글귀들이 그런대로 당기는 맛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뜯어먹은 것이 한 달여 지나니 '도덕경'과 '논어'를 주마간산처럼 훑을 수 있었다.

성취감이 밀려왔다. 긴 세월 미뤄두었던 숙제를 마친 느낌이다. 다른 분야의 서적이라고 읽은 것이 있을까만 선조들 사상의 뿌리라고 할 만한 한 부분을 어설프게나마 더듬어 보았다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조상들이 1500년 가까이 일상처럼 대했던 책들이 너무도 생경하다. 내 세대가 영어에 치우친 걸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서양 고전을 한 두 권이라도 독파해 본 게 있던가? 내 인문학적 소양의 얄팍함을 인정한다. 1500년여를 사용해온 문자에 70여년 영향을 받은 언어에도 못 미치는 애정과 관심을 쏟고 있다는 것은 거의 홀대한 것과 다름없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선조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사상의 바탕이 다르다. 동양의 사상은 옅고, 서양에 기대려 하지만 쉽지 않다. 학교중심 교육의 근원이 서양에 닿아있어 세대 간 단절을 겪기도 하지만 더 큰 것은 역사적 단절이다. 이제 와서 유교적 세상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

유교는 중국이라기보다 동양의 사상이다. 동양의 왕조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 바탕에 깔린 것은 유교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인(仁)을 중시했는데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인이라 했다.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다. 예(禮)가 아니면 사람이 설 수 없다고 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관계 안에서의 행함이다. 예(禮)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공자는 예를 따라 사는 것이라 했다.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 비례물사(非禮勿思), 비례물행(非禮勿行)이라 했으니 말이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유교적 가치관은 관계중심이다. 이것이 자유와 개인을 강조하는 서양적 가치관에 밀리는 형세다. 가치관은 문화를 반영하고 문화는 생활과 함께 한다. 그러니 문화를 모르면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게 동양고전 아닐까? 뿌리로부터 너무 벗어나 있어 우리에게 적절한 자리 찾기가 필요하다. 고전(古典) 두 권을 아주 조금 맛보며 든 짧은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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