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지붕에도 비녀가 있어요." 도편수의 말에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다. "추녀선을 짧게 하면 문제가 없지만 길게 빼면 무너질 수 있어요 그래서 서까래의 안쪽을 고정할 필요가 있지요."

도편수는 말하며 모형 한옥이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게 도리예요. 들보와 직각으로 교차되며 한옥을 사각구조로 안정시키지요. 도리 아래엔 장여, 소로. 창방 등이 놓이고 도리 위로 서까래가 얹히죠. 그 위에 기와가 얹히는 거구요. 서까래가 길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추녀선이 길게 뻗어짐으로서 한옥은 빛가림도 되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무너질 위험을 지닌다. "고정 방법이 필요하지요. 커다란 돌을 넣어 누르는 원시적인 방법도 있고 띠쇠로 돌돌 매는 방법도 있어요." 지붕에 돌이 들어간다는 말에서 마치 지붕이 알을 품고 있는 듯한 이미지가 스쳐갔다.

"강다리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물건이 어긋나지 않도록 괴는 나무를 강다리라고 해요. 서까래의 안쪽에 구멍을 파고 강다리를 박아요. 강다리에도 홈이 패여 있지요. 도리 아래쪽의 장여 부분을 비녀로 관통시켜 고정시키지요."

비녀는 나로선 추억의 산물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 할머니는 대청 마루에서 머리를 길게 땋아 엮고는 비녀를 꽂곤 했다.

"지붕에 돌을 넣어 서까래를 고정시키는 방법이나 강다리와 비녀로서 고정시키는 방법 둘 다에 지렛대의 원리가 적용되지요."

도편수의 말마따나 건축에 과학의 적용은 필수일 테지만 나는 지붕에 꽂힌 비녀가 주는 이미지의 매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길게 땋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할머니의 이미지 정도에 국한된 감각이 도편수로 인해 할머니가 거하던 한옥 역시 머리에 해당되는 지붕에 비녀를 꽂은 모습으로 확장된 것이다.

지붕에 넣는 돌이 고대의 향기를 품고 있다면 띠쇠는 공학적이다. 비녀는 뭔가 다른 차원을 품고 있어 보인다. 한옥에 쓰이는 도리, 들보, 장여 등이 정식 명칭인 반면에 비녀는 그렇지 않다. 정식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강다리에 암수 짝으로 걸맞는 물건을 보면서 목수들은 자신의 할머니나 어머니가 머리에 꽂던 비녀가 어른거렸을 지도 모른다. 이름도 없이 목수들의 가슴 속에 있던 말로서 통용된 것. 그러나 그 비녀가 없다면 긴 서까래는 무너지고 만다. 멋드러진 처마선도 기와도 붕괴된다. 정식 명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름도 없는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관계를 긴밀하게 묶어주며 빛가림과 미의 극대화를 위해 필연으로 존재하는 것. 사람에게나 쓰이는 건줄만 알았던 그 비녀로 인해 한옥에 색다른 애정이 뭉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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