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61주년에'
'4·19 61주년에'
  • 중부매일
  • 승인 2021.04.1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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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일주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코로나19 사태는 더 더욱 엄중해 지고 있는데도 새 봄이 되어 어김없이 화려한 꽃들과 신록이 다투듯 피어난다. 그래서인지 엊그제 지난 세월호 7주기의 아픔이 크고, 4·19. 61주년을 맞이하는 가슴이 여전히 먹먹하다. 이런 날에는 예쁜 꽃 이야기도, 꿈을 담은 봄 이야기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1960년, 당시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민주의거가 2월 28일 대구에 이어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1천여명의 고등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있었다.

그런데도 3·15부정선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은 민주주의 열망에 가득했던 국민 여론에 반하여 '투표함 바꿔치기', '죽은 사람 명부 올리기' 등등 온갖 불법선거를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해 당일 마산에서 제1차 시위가 있었는데, 이 날 경찰이 쏜 총에 시민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이후 11일에는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대학생, 주부, 노인, 고등학생 등 수천명이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제2차 마산의거가 있었다.

그 해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의 학생들이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평화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중에 정치깡패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4월 19일에 전국의 대학생, 고등학생과 시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정부는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해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천26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제자들의 희생에 가슴 아파했던 대학 교수들이 4월 25일에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행진을 하자, 다음날 새벽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3만여 학생, 시민들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당시 이승만은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국가에서는 4·19 혁명 희생자를 위해 서울 강북구에 '국립 4·19민주묘지'를 조성하여 412명의 유해를 봉안, 1962년에 개원하였다.

'자유. 민주, 정의'로 요약되는 4·19의 정신은 공주에도 여실히 남아 있다.

당시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던 조병옥박사가 공주영명학교 제2회(1909년) 졸업생이다. 공주사범대학의 교수들이 당시 정부의 자유당 입당 권유에 불복하였으며, '학도호국단'이었던 학생회 명칭도 4·19 이후에 '총학생회'로 변경하였다.

심지어는 공주 시내중심지에서 10여㎞나 떨어져 있던 면소재 초등학교에서도 교사들이 인솔하여 초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교사가 선창하면 학생들이 따라서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1961년 4월 19일 공주우국노인회 주관으로 세운 '庚子 四, 一九學生革命紀念碑(경자 4, 19학생혁명기념비)'가 영명중·고 정문 우측 3·1중앙공원에 서 있다.

무고한 시민들이 정부군에 의해 700명 이상이 숨졌는데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얀마 사태를 보면서, 61년 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부모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나섰던 우리나라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일주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이일주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의 힘으로 불법 정권을 무너뜨린 4·19혁명이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61주년을 맞이하는 4·19기념일에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신 영령들께 삼가 깊은 경의를 표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미얀마 사태가 하루 빨리 종식되길 바라는 마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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