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어린 시절 수도 없이 읽었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외우다 시피 할 정도로 읽어 주었던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40대 중반이 된 지금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안데르센은 덴마크가 낳은 세계 최고의 동화 작가 중 한 명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그가 1837년에 쓴 동화로 원제는 'Kejserens nye Klæder(황제의 새로운 옷)'이다.

이 동화가 이렇게 나에게 새롭게 다가온 이유는 동화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야기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기가 막히게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19세기에도 '웃픈' 세상 속 바보 같은 모습들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했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 사회 구석구석 '벌거벗은 임금님'들이 버젓이 나다니고 있는 상황이 나의 알량한 정의감을 자극한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 더 큰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임금과 임금에게 차마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거짓으로 아첨하는 신하들, 그리고 임금의 우스꽝스런 행차를 보며 침묵하는 길거리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외친 어린아이, 나는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은 조직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自問)해 본다.

최근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농단 사건 핵심 인물인 최서원 씨가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며 교도소 관계자들을 고소했다고 한다. 이렇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점을 당당하게 문제제기 하는 그녀가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온갖 부정과 권한남용을 저지를 때 주변의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임금에게 거짓으로 아첨하는 신하들과 임금의 우스꽝스런 행차를 보며 침묵하는 길거리 사람들이었다.

얼마 전 4·7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참패한 후 2030 세대 초선의원 5명은 입장문을 통해 통렬한 반성의 목소리를 내었다. 이에 대한 시각은 엇갈리지만 소속 정당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선거 패배의 원인이 소속 정당 안에 있다고 외치는 모습에서 기득권 정치세력에 신물이 나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보여 주었다. 이들은 조국 사태,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 성추행 사건, 부동산 정책 추진 등 주요 현안에서 소신껏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당내에서 '침묵했던 길거리 사람들'이었던 것을 후회했다.

비단 정부와 정당과 같은 거대한 조직이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조직들에서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상황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런 조직은 경쟁에서 뒤처지고 위기 앞에서 자멸하게 된다. 왜냐하면 올바른 토론과 논쟁으로 합리적 대안과 문제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김영식 서원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토론과 논쟁으로 세상과 조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토론과 논쟁이 없이 바뀌는 세상과 조직은 없다고 한다. 토론과 논쟁은 조직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침묵이 아니라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외칠 수 있는 양심과 소신을 가진 구성원들이 있어야 한다. 구성원들의 용기도 필요하지만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리석고 무능하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임금, 아첨하며 따르는 신하들을 보며 의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벌거벗은 임금"이라고 소리쳐야 한다. 부끄러움에 도망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 제대로 된 새 옷을 입게 만들어야 한다.


이 기사는 지방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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