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잔잔한 물결 위로 늘어진 가지가 바람에 낭창낭창하다. 봄과 여름 사이, 긴 겨울을 견디고 잎을 틔운 연둣빛 나무는 눈 돌리는 곳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나이가 들면서 초록색이 좋다. 자연의 색도 좋지만, 옷이나 액세서리도 초록색이 끌린다. 초록빛 갈증이 생기면 가까운 산이라도 달려가 자연으로 들어간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등 자연이 들려주는 부드러운 소리에 귀 기울인다. 봄날의 숲은 생명력이 넘실댄다.

태생적으로 녹색에 대한 그리움이 있던가. 사람의 유전자는 초록을 그리워한단다. 태초에 자연환경을 좋아하는 인간의 유전적 소질을 이르는 말로 에리히 프롬은 녹색갈증(綠色渴症)이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에 대해 타고난 애정을 품고 있고, 자연을 경험하려는 생물학적 욕구를 느낀다는 뜻이다. 자연은 편안함과 힐링 등의 긍정적 작용이 있다. 가슴 먹먹한 날, 영롱한 연둣빛은 마음을 치유해 준다. 특히나 신록 돋고 산 벚꽃 핀 날, 비까지 내려 물안개까지 있다면 몽환적인 분위기에 '좋다' '좋다'를 연발한다.

봄 산은 색이 좋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가두어 놓았다가 또 보고 싶을 만큼 상큼하다. 먼 산 연둣빛 사이사이 만발한 산 벚꽃이 지고 있다. 꽃비가 내린다. 꽃잎 난분분한 낙화에 내 맘 어느 곳 여린 곳은 하르르 하르르 하다.

H 시인과 물가에 섰다. 여고 동창이니 참 오랜만에 만남이다.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사십여 년 전으로 돌아갔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교정, 수업 시간에 들어오신 국어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칠판에 글씨를 쓰셨다. '연둣빛 눈짓을 주세요…….' 칭칭 늘어진 창밖 능수버들에 시선을 두고 시를 읽어 내려갔다. 첫 소절만 기억되지만, 연둣빛에서, 봄비와 촉촉한 분위기에서, 감성이 폭발했다.

그 감성은 바삐 사느라 마음속에 가두어두었다. 이따금 비가 내리고 오늘처럼 연둣빛 나무들이 눈짓할 때면 아~~하고 한숨 돌려 보았지만, 숨 가쁜 일상에 지나쳤고 이제야 보니 빠른 세월이었다.

SNS에서 보던 친구는 고왔다. 한복을 입고 시를 쓰고 낭송을 하며 행복해 보였다. 서로 시집과 수필집을 사인해 주고받으며 금세 속내를 얘기했다. 나만 기구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는데, 잔잔하게 쏟아내는 친구의 삶은 나보다 더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스치는 바람결에 풀어놓는 삶의 허무가 가지처럼 흔들린다.

물가에는 지난여름 태풍에 휩쓸린 채로 삐뚜름히 있는 키 작은 버드나무들이 있다. 세상사 다 힘든 일 있는 거라고, 어린나무도 이렇듯 태풍을 버티며 자라고 있다고, 힘내라고 일러주는 것 같다.

교정의 능수버들은 베어지고 없다. 아쉽지만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 교정에서 연둣빛 가지를 늘어뜨렸던 나무, 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았다. 다른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고, 우리는 나무 아래에서 조잘대었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우리는 얼마만큼 각자의 시간을 지나 여기서 만났는지는 중요치 않다. 인연이 다하는 날 어떤 빛깔의 추억을 느낄 수 있을까. 진하게 향기 피웠던 꽃들 지고 연둣빛이다. 꽃송이와 더불어 화려했던 시절은 지났다.

몸도 마음도 늘 푸르러지고 싶다. 자연에 머물며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고 싶다. "넘어져도 괜찮아." "잘살고 있어." 우린 연둣빛 버드나무 가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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