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햇빛과 바람과 비에 제 몸 낡아 삐걱거릴지라도 숙명같은 책임감으로 노를 저어야만 하는 나룻배.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깊으나 넓으나 건너편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고단한 노동자. 목적지에 이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갈 길로 향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몫이라 생각하는 나룻배. 때로 흑발로 짓밟히고 침 뱉음을 당할지라도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건널목까지 건네주는 거룩한 사명을 감내한다. 그 곳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하는 많은 날들을 보내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또 세월이 가고 오는 것이다.

해마다 만나는 학생들을 한 계단 위로 보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선생님도 역시 나룻배다. 스승과 제자로 서로가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선생님일 것이다. 스무 살 때부터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또 주경야독하는 야간 자활학교 학생들 검정고시 준비를 돕던 대학생 선생님은 학생들이 또래이거나 인생 선배이기도 했더. 교사역할을 감당하며 나 역시 나룻배 같은 삶을 살았다. 사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면 한두 살 나이 차 밖에 나지 않았다. 그때의 제자들을 만나면 누나. 언니로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옛 이야기를 나눈다. 지금까지 많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아왔고 또 학교와 교회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내게도 정말 잊혀지지 않는 고마운 선생님이 계시다.

딸아이를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킨 초보 학부형 때의 일이다. 1학년 아이들에게 제일 시급하고 당면한 어려운 일은 받아쓰기다. 소리글과 쓰기가 일치 하지 않는 우리글 익히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탓이다. 보통은 열 칸 받아쓰기노트에 동그라미 열 개 100점을 맞으면 "참 잘 했어요" 도장을 찍어준다. 그리고 틀린 글씨는 또 다시 숙제로 내주며 일 학년 내내 한글 익히는 과정이 계속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사는 저마다의 방식과 사랑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선생님은 독특하고 창의적인 수업을 하셨다. 아침 자습시간에 동시 한 편을 칠판에 써 주시고 매일 5번씩 쓰게 하는 것이다. 2학기에는 제목은 빈칸으로 두고 동시를 다 쓴 다음, 그 시의 제목을 맞추게 했다. 처음엔 한 두 명 아이들만 맞추더니 나중엔 시를 읽고 쓰고 거기에 알맞는 제목을 학생들 전체가 맞추는 것이다. 교실 눈높이 책장에는 처음 한글을 배우고 익히는 아이들이 즐겨 읽을 수 있도록 다양한 동시집을 준비해 두셨다. 커다란 글씨체와 파스텔풍 삽화가 그려진 예쁘고 고운 책을 가까이 두고 읽기지도를 해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꿈, 행복, 사랑, 하늘, 구름, 아가…, 순 우리말이 가득 들어있는 아이들의 마음 밭을 곱고 예쁘게 키워주는 글 동산이었다.

개중에 받아쓰기와 글자공부는 안 가르치고 무슨 동시공부냐며 선생님의 수업 방식을 못마땅해 하는 엄마들도 있었다. 독창적인 수업으로 소신있게 학년을 끝마친 선생님의 큰 그림은 이미 받아쓰기 단계를 뛰어넘은 아이들 마음에 시심(詩心)을 불어 넣어준 일석이조의 수업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다 받아쓰기 공부를 할 때 그 이상을 가르쳐주신 역발상적인 창의적인 수업이었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누가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때 묻지 않은 동심과 시심을 선물 해 줄 수 있을까? 선생님은 마음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수업을 하신 것이다. 1학년 아침자습시간은 딸아이의 인생여정에 큰 선물을 주신 값으로 살 수 없는 길잡이가 되어 주셨다, 그 후 선생님은 시골 학교로 전근 가셨다. 어린 제자와 그 엄마의 마음속에 여전히 계시는 큰 스승. 기꺼이 나룻배의 사명을 감당하신 잊혀지지 않는 선생님은 평생의 스승이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