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전무이사·수필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아직도 누군가의 그늘에 가려 얼굴조차도 알 수가 없다. 정녕 얼굴 없는 여인, 비존재인가. 최근 국립현대청주미술관에서 열린 '삼중 통역자', 박래현(1920~1976) 화가 전시회를 인상 깊게 둘러보고 그녀의 삶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한다. 그 결과를 보고 통탄한다. 동반자의 그늘에 가려 그림자처럼 머물다간 여성이라도 그렇지, 한국 화단의 독보적 화가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전은 참으로 친절하다. 당사자가 궁금한데 왜 '누구의 아내'란 걸 들먹이는가. 백과사전은 어이없게도 말문을 막아버린다. 남편의 이름을 거론한 것도 모자라 본인의 얼굴도 아닌 남편 사진이 큼지막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글을 편집한 사람은 관습에 물든 남성이리라. 이글을 그대로 둔다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박래현'이 남성 김기창 화백인 줄 알리라.

화가 박래현도 때로는 삶이 고단하여 성질도 나리라. 김기창 화백의 그림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큰 두상에 뿔이 두 개 돋고 부엉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동자에는 노란 불꽃이 일어난다. '나는 당신의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듯싶다. 아니 정말 화가 난 듯 허리춤에 팔을 대고 무언가 따지는 듯 화가 난 표정이다. 관습을 향하여 성질을 부린다고 무슨 소용이랴. 청력 잃은 남편에게 큰소리를 지른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차라리 면벽수행자처럼 벽에다 소리를 지르는 것이 나을 성싶다.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고자 잠을 줄여야 했다'고 고백한다.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청각장애인 남편을 보살피고, 아이 넷을 뒷바라지 하느라 낮에는 짬이 나지 않는다. 온종일 집안일을 마친 늦은 밤에야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단다. 버젓한 작업실도 하나 없이 남편의 화실 귀퉁이에서 그림을 그리는 박래현의 모습이 보여 가슴이 뭉클해진다. 영상 사진은 그 시대 여성의 위치를 말해주는 듯해 더욱더 안타깝다. 그녀의 일인삼역, 극심한 생활의 고통을 생각하니 전시회 '박래현, 삼중 통역자' 중의적 표현의 제목이 무겁게 다가온다. 그림자 같은 삶을 버텨낸 건, 아마도 모성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여성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우선 여성의 생활상을 묻고 싶다. 내가 바라본 할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삶이 그녀와 별다를 것이 없다. 여성의 삶은 대부분 사랑, 의무, 모성 등속으로 점철되리라. 자신만의 예술 행위는 생각지도 못하던 시대가 아니던가. 모든 상황을 감내한 화가의 활동은 대단하다. 식구를 모성으로 품는 어머니의 삶에 충실하며, 화가의 삶을 훌륭히 일궈낸 그녀가 자랑스럽다.

화가에 생전의 전시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편과 자식의 그림자처럼 살아간 박래현 화가. 작품보다 그녀의 치열한 삶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 여기에 있다. '20세기 한국 화단에 선구적 자취를 남긴' '박래현, 삼중 통역자'로 화가의 존재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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