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됐던 1968년 가을. 학교가 목조건물이어서 교실 바닥이 나무 널빤지로 되어 있었다. 청소할 때 일단 빗자루로 먼지를 제거한 뒤 걸레로 직접 널빤지 바닥을 닦았다. 마치 집에서 젖은 걸레로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힘껏 문지르는 걸레질처럼 말이다. 물걸레질이 아닌 기름걸레질이었다는 점이 다르다. 기름걸레는 학생 각자 집에서 헌 옷 등을 기워 만든 양손을 펼친 크기보다 약간 큰 손걸레였다. 기름도 각자 가져와야 했다. 늘 기름걸레질을 해 댔으니 널빤지가 빛이 날 정도였다. 미관이나 위생보다 부패방지를 위한 일종의 코팅작업이었다.

시골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기름은 들깨를 짜서 얻은 들기름이었다. 대부분 학생이 들기름을 박카스 병에 담아왔다. 많은 농가가 들깨를 재배해도 들기름은 필수 요리재료여서 장에 내다 팔면 만만치 않은 수입이었다. 당시만 해도 같은 학교에 2~3명의 자녀가 다녀 교실 바닥 청소용으로 학교에 보내는 들기름은 어머니의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부모는 병을 가득 채우지 못한 채 절반 정도 담아주었다.

학생들은 들기름을 병에 가득 담아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들기름을 반 정도만 담아오는 학생들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냥 가져가자니 선생님으로부터 혼날 테고 엄마에게 더 달라고 투정을 부려봤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궁즉통(窮則通)이라 했던가? 나름 기발한 방법이 떠올랐다. 들기름병 공간에 물을 채우는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는 원리를 그 학생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름병을 낼 때 힘껏 흔들어 강제로 혼합하려 해도 순간 섞이는 듯하지만, 곧바로 기름과 물은 제자리로 돌아가 낭패였다. 그 학생에게 돌아온 것은 '멍청한 놈'이라는 꾸중과 함께 교실 뒤에서 무릎 꿇은 채 손들고 서 있는 체벌이었다.

며칠 전 저녁이었다. 아내는 요리하던 중 잘게 썬 양파를 프라이팬에 볶아 달라고 했다. 먼저 달궈진 프라이팬에 아보카도 기름을 세 숟가락 정도 넣은 뒤 조금 있다가 양파를 투하하라고 했다. 골고루 볶기 위해 뒤집개로 양파를 뒤적이라고 했다. 사고는 여기서 터졌다. 뒤집개가 프라이팬에 닿은 순간 말이다. '빠샤샥'하면서 기름이 팔에 튀어 잽싸게 팔을 프라이팬에서 멀리했지만 튀는 기름을 피할 수 없었다. 기름에 10여 군데 화상을 입었다.

사고 원인은 물과 기름이 끓는 온도, 비등점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1기압 하에서 물은 섭씨 100도, 기름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50도 이상에서 끓는다. 프라이팬의 기름은 비등하지 않았지만 이미 100도를 넘었다. 여기에 비등점이 100도인 물이 닿으니 순간 기화되면서 부피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때 기름이 위로 튀었다. 뒤집개에 아주 적은 물이 묻은 것을 몰랐고 아마 알았더라도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화근이었다.

물과 기름은 절대 섞이지 않는다. 물은 극성(極性)분자이고 기름은 무(無)극성분자이다. 극성은 극성끼리, 무극성은 무극성끼리 섞는 성질이 있다. 물은 분자마다 양극과 음극의 자석으로 볼 수 있지만, 기름은 극성이 없어 그러하지 못하다. 그러니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는다.

시골 학생 시절과 최근 경험을 통해 우리 정치사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 몹시 씁쓸하다. 혼합(합의)되지 못한 채 갈등을 첨예화하고 파열음을 내는 정치 형국 때문이다. 줄 세워 네 편 내 편을 가른 뒤 대치극을 벌인다. 이런 끊임없는 평행선에선 쪽수가 최대 무기다. 합의 모양새를 갖추지만, 기름과 물을 흔들어 섞고 칼자루 쥔 권력을 휘둘러 봉합하는 미봉책이다, 춘향이를 억지로 수청 들게 한 변 사또와 무엇이 다른가? 이런 합의는 가뭄에 난 콩처럼 상품 가치가 없어 폐기 처분된다. 국민은 패거리 의식과 사욕으로 똘똘 뭉친 정치인들이 지배하는 국가로부터 조롱당하거나 화상을 입는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손오공과 천구(天狗)가 지루하고 지난(至難)하게 싸우는 '견원지간(犬猿之間)', 얼음과 숯불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빙탄지간(氷炭之間)', 개들이 진흙탕 속에서 싸우는 '이전투구(泥田鬪狗)'. 모두 우리 정치를 빗댄 말이 아닐까? 왜 우리 정치는 이런 동물과 사물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며 '차이 없는 반복, 모방'을 계속하는 것일까? 정치인들이여! 패거리의 동일성과 표상(表象)에 지배되는 정치적 사유와 행동을 탈피하고 차이를 인정하면서 생성(生成)을 추구하는 열린 모습을 보여라! 그렇게 많은 특권의 녹봉(祿俸)을 먹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기어코 배부른 돼지에 머물겠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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