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김동우 논설위원

집단행동이나 일인 시위 때 피켓 구호를 보거나 외침을 듣는다. 무엇을 요구나 주장하거나, 폭로나 위협하거나, 명령이나 강요하는 수가 대부분이다. 섬뜩하거나, 측은하거나, 지나치거나, 가증스럽거나, 동조적이거나 등등 다양한 반응과 함께 그들 행동에 참가하거나 마음으로 같은 입장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냥 지나치는 수도 있다. 언론 등 각종 미디어나 광고 옥외 세움간판 등의 광고 문안을 수시로 접한다. 문안에 몰입되어 충동구매를 하거나 그런 욕구가 솟아오를 때가 많다. 뇌리에 오랫동안 남기도 한다.

이때 우리는 피켓 구호, 시위자의 외침, 광고 문안에 대해 이성적으로, 아니 곰곰이 따져보지 않았다. 이해득실의 계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왜 우리는 그들의 행위나 목적에 즉각 동조하거나 하려고 했을까?

이런 표어, 구호, 외침, 문구, 문안 등을 '슬로건(slogan)'이라 한다. 슬로건은 스코틀랜드 게일어(Scottish Gaelic)의 'slogorn'과 아일랜드(Irish) 언어의 'sluagh-ghairm'에서 유래된 용어다. 'sluagh'는 '군대'를, 'ghairm'은 '외치다'를 뜻한다. 당시 아일랜드 군대에서 '위급 상황을 외치는 소리 신호'로 쓰였다고 한다. 이 'sluagh-ghairm'은 'slogan'으로 바뀌면서 중세 이후 유럽 전역 전쟁터에서 암호로 사용됐다.

이런 군대 용어가 일반화되면서 의미가 보다 확장되었다. 특정 집단이나 대중을 설득할 사상과 이념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언표(言表)로 말이다. 종족, 정치, 상업, 종교 등 여러 맥락에서 간결, 명료한 모토(motto)나 문구로 변신했다. 특히 한눈에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하고 대중에게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가치를 포함했다.

이렇게 되자 슬로건은 판단 기준의 우선순위에 '감정이나 정서, 혹은 순간'을 위치시켰다. 냉철한 이성이나 이해타산이 뒤로 밀렸다. 그래서 슬로건은 대중의 이성을 마비시키거나 일시 중단시켜 대중을 감정적이고 정서적 사유와 행동에 빠져들게 한다. 대중은 내외부로부터 투입되는 자극을 암시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인 암시 가능성(suggestibility)이 강하므로 정서적으로 채색된 슬로건은 조작과 조종의 효과를 나타내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슬로건이 말초적, 자극적, 감각적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슬로건은 명령적 특성도 지녔다. '명령의 모토(motto of order)'이다.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명령적 슬로건의 대표적 예다. 불특정 노동자들은 이 슬로건의 명령에 따라 조작되어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묶이게 되었다. '무능정권 퇴진, 광화문으로'라는 슬로건 역시 명령어의 특성을 보여 준다. 이 구호를 보고 대중이 광화문으로 몰려 군중이 된다. 슬로건은 행동을 유발하는 명령어인 셈이다.

슬로건은 짧은 시간과 좁은 공간에 수많은 정보량을 집약시켜 대중을 삽시간에 사로잡는다. 그리고 행동하고 사유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를 상실한 채 껍데기만 남아 슬로건의 꼭두각시가 된다. '대중조작'에 걸려든 셈이다. 이 대중조작은 정치인들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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