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짊어진 누명… 억울함 벗고자 조심스럽게 용기내"

Q씨 소령 진급 당시 모습.
소령 진급 당시 Q씨 모습.

[중부매일 신동빈 기자] 1979년 10월 제1공병여단 보안대, "동서남북" 마주앉은 이의 차가운 음성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남성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끌려온 이는 군 생활 8년차를 맞은 Q(73·당시 소령)씨였다. 석사장교(특수간부 제도)로 임관한 Q씨는 성실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남들보다 진급이 빨랐다. 시간이 지나 Q씨는 자신이 누군가의 공작에 휘말려 누명을 쓰게 된 사실을 알게 됐다.

Q씨가 보안대로 끌려간 1979년의 시대상은 남다르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979년 10월 26일)'으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Q씨는 이런 시대적 혼돈이 자신이 누명을 쓴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사건 발단은 이렇습니다. 1979년 제1공병여단 부대 전입(9월) 후 김상사라는 이가 와서 군종실장인 제게 '장병들에게 YMCA위장결혼사건과 한국기독교협의회 WCC·도시산업선교회·안동농민회(천주교정의사회구현사제단) 등에 북한의 공작금이 침투됐다'는 교육을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교육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Q씨는 김상사와의 만남 때마다 이상한 질문을 받는다. 내용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마사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등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이때 나눈 사담은 한번 들어가면 못나온다는 보안대 문턱을 넘는 근거로 작용한다.

"보안대에 들어가니 강소령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는 제 장점이 적힌 동서남북 게임 종이를 보여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곤 영문도 모른 채 지프차에 실려 101보안부대로 연행됐습니다."Q씨는 이곳에서 강도 높은 수사를 받게 된다. 흔히 말하는 사상검증이 주를 이뤘다. 잠도 자지 않고 3일간 이어진 수사 끝에 그는 구속됐다. 구속 수감되면서 헌병대로 옮겨진 Q씨는 수감자들에게 행해지는 인권유린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구타와 폭언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정신은 점차 피폐해져갔다.

20여일의 헌병대 수감생활 이후 제1군단 검찰부로 이송된 Q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혐의를 처음 확인한다. 계엄법 위반 외 위수지역 이탈, 라면취사 등 총 35가지의 혐의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가족과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확대된 수사에 두려움을 느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변호사 조력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재판이 진행됐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항소나 재심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전역한 사령관 출신이 대통령을 하고, 군 출신 인사가 요직을 차지하는 시대에서 제가 참는 것이 주변을 다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로 군복을 벗은 Q씨는 42년이 지난 2021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날의 억울함을 벗고 조금이나마 마음의 쉼을 얻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 용기를 내게 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으로 재심을 하게 된 그는 지난 22일 법정에 다시 섰다.

청주지법 형사2단독 이동호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재심에서 Q씨는 "재심의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고 운을 뗀 후 "시대적 분위기 탓에 사건의 유무죄를 제대로 다투지 못했고,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토로했다.

Q씨 변호인도 "42년 전 적용된 혐의는 계엄법이 정한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영장주의·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도 위배된다"며 앞선 판결이 잘못됐다고 했다. 또 "무단이탈에 대해서도 어머니 병환 때문에 형의 집을 방문한 것이고, 지휘관인 여단장에게도 보고가 됐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Q씨의 재심 선고공판은 오는 8월 12일 오후 2시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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