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소설을 쓰다 보니 다양한 상식이 절실하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주로 역사와 문화재 공부다. 이번 답사는 강원도 일원이다. 참 소리 박물관 답사도 새로운 악기의 역사를 알게 되었고 좋았지만 오죽헌과 선교장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은에도 아흔아홉 칸 집이 있어서인지 별 기대 없지만 일행을 따라서 아흔아홉 칸 집 선교장에 입장을 했다. 어! 생각과는 달리 입구에서부터 전신을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승천을 준비하는 용을 보는 듯 첫밗에 내 혼을 앗아간 건, 고래 등 같은 검은 기와지붕 너머 광경이다. 아름드리 검붉은 몸으로 꿈틀거리며 위용을 뿜어내고 있는 소나무들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저만치서 일행들이 어서 오라는 손짓에 정신을 차리고 미리 선교장에 대한 공부를 했던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300여 년 전, 그 때는 바로 앞에까지 경포대 호수여서 배를 이어 다리로 사용했기 때문에 배다리 집이라 명명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한번쯤은 누구나 들었을 게다. 또 다른 설명은 집터가 뱃머리를 닮아서 명명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내 관심은 집에 대한 명칭보다 팔작지붕으로 무직하게 체통을 뿜어내는 처마 아래 줄줄이 유명한 묵객들의 현판을 지나면서 신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 이 집의 주인 이내번(李乃蕃)은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후손일 뿐인데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위세를 떨칠까. 왕족이라는 이유의 세도를 가히 짐작하게 된다. 행랑채 앞 넓은 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는 ㄱ자형으로 방과 누마루로 되어 있다.

민도리소로수장집이라고(건축방식, 설명이 좀 길다)하는 처마에는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모두 띠살 창호를 달았다. 연못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산을 인공적으로 쌓아 만들었다는데, 소나무를 딱 한 그루만 심어 운치를 더해준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지금은 대한민국이며 이제 왕족도 단순하게 전주 이 씨라는 정도뿐이지만 아직도 전국의 백성들이 한번쯤 보겠다고 선교장을 찾아온다. 동별당과 서별당, 외별당에 연지당, 열화당…, 다 열거할 수가 없는 유명 묵객들의 현판이 붙은 기와집들과 그 안의 세도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소나무라 기 보다 꿈틀거리는 용들이다. 지배자와 지도자의 차이다. 지배자에게 세도는 당연지사로 여기고 살았던 시대였다. 혹여 못난 짓은 없었을까. 이 집을 지을 때 인부들은 노동의 대가를 받았을까. 별별 상상을 해본 시간이었다. 또 일행들의 부름에 잰걸음으로 따라가야만 했다.

김구선생이 직접 쓰고 선물했다는 휘호를 설명하며 이어서 이 선교장의 6대 종손 이근우가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태극기 설명에 해설사도 우리도 한참 가슴에 진한 감동이 일었다. 독립운동에 물심으로 응원하고 적극적이던 선교장 가문이 가로 153㎝ 세로 145㎉ 크기의 태극기를 제작해서 선교장에 설립되었던 근대식 학교인 동진학교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건곤감리 4괘를 잘라낸 후 다시 그 바탕에 오려낸 4괘를 한 땀, 한 땀 박음질로 붙인 태극기다. 직접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만 보았다. 동진학교가 일본의 탄압으로 4년 만에 문을 닫은 후에도 태극기는 고이접어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보관하고, 피난길에는 품속에 안고 간직했다고 한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2015년 한옥은평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시회를 위해 처음 세상으로 나와서 빛을 보게 되었고 진관사에 소장된 태극기와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땅에 묻고 가슴에 묻으며 간직해온 그 정성도 우리는 영원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첫 대면부터 권력을 휘두른 건 아닐까 짐작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조선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배다리 집 가문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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