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많은 이들이 다니면 길이 난다. 길 따라 사람과 물품이 흐른다. 길을 국토의 동맥이라 부르는 이유일 게다. 우리 산업화의 상징은 경부고속도로였다. 길은 지역 주민의 삶을 바꾼다. 현대의 길은 차 중심이어서 넓이와 길이와 견고성이 있어야 한다. 빠르게 멀리 오가려니 곧고 넓어진다. 시골로 갈수록 신작로가 나기를 바라지만 길과 함께 보다 큰 도시로 사람과 물자가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를 한다.
이제 사람들이 다닌다고 길이 나지 않는다. 만들어진 도로 위로 차가 달린다. 건설에 돈이 많이 들어 국가나 지자체가 길을 만든다. 그래서 현대의 길은 은밀히, 어느 날 갑자기 생길 수 없다. 다수의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어 오랜 기간 공사를 하고 개통식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노고를 기리고 한껏 축하한다.
우리 지역 일간지에 새로 난 길 소식이 실렸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잊고 있었다. 아내가 며칠 전 그 길 이야기를 했다. 청주 주변을 가끔 돌아보아도 새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도로표지판과 진입로가 있고 축하 펼침 막이 걸렸을 거라 여겼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검색해보았다. '월오-가덕로'였다. 위치를 알아보려니 풍경사진은 많은데 지도는 드물고 지명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여러 시도를 거쳐 주변지역들을 알아냈다. 면허시험장, 황청리 문주리…, 어디쯤이라는 감이 온다.
목련공원 방향으로 가 보았다. 큰 길이 눈앞에 다가온다. 저것이구나, 아니었다. 진입로를 만드는 중이고 표지판이 없다. 조금 더 올라가니 찾는 도로의 안내판이 나왔다. 예상보다 조촐하다. 양편으로 1차선에 산을 뚫었는지 짧은 터널이 두 개가 있다. 십리가 안 되는 짧은 거리에 제한 속도 40㎞. 길을 다 갈 때까지 두세 대의 차밖에 보지 못했다. 호젓한 산속, 느낌이 새롭다. 길과 이어진 마을들은 처음 가 보았다. 청주서만 긴 세월을 살았는데 신기하다.
숨어 있는 길이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곳이다. 길가의 꽃들과 산속 나무들이 싱그러움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노랑과 하양 그리고 보랏빛 꽃들로 마음이 괜히 설렌다. 숨겨진 풍경 중 한 곳이 드러났으니 서서히 사람들이 찾아 올 게다.
통행이 많아지면 편의시설도 늘어날 거다. 산에 올라 주변을 감상할 지점과 짧은 등산로가 만들어져 삶에 여유를 얻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새로운 길이 났다는 축하 걸개들을 보면서 길은 칼과 같다는 어떤 이의 말이 생각난다. 그리 보면 차가 다니는 포장된 길도 필요하지만 자연을 즐기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조붓한 길들이 시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면 색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성안길이나 언덕배기 길, 오래된 번화가의 골목길들은 자연발생적이어서 불편한 점이 여럿이다. 의도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려운 현대인들을 위해 도심 중간 중간에 사색의 길을 만들면 어떨까. 적당한 곳에 한두 개 쉴만한 의자가 놓이고 몇 권 시집이 있는 서가가 자리하면 더 좋겠다. 그러면 말 그대로 새로 난 길이라 할 수 있을 게다. 그런 길이 내 주변에 생긴다면 기대를 가지고 자주 찾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