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퇴근하는 남편이 손에 꽃다발을 들고 들어왔다. 쑥스러운 듯 건네는 꽃다발과 다른 한 손에 들려있던 종이 가방을 건네받고 잠시 설레었지만 이내 안타까운 탄성으로 바뀌었다. 종이 가방 안에는 직장에서 만들어준 정년퇴직 기념패가 담겨있었다. 살짝 당황하는 내게 남편은,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로 직원들과 조촐하게 퇴임식을 가졌다고 했다.

남편 퇴직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애잔하고 씁쓸하고 기분이 묘했다. 본인의 기분은 어떨까 싶어 괜찮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았다. 남편은 멋쩍게 웃으며 "세월이 그렇게 갔네 이 사람아…, 난 괜찮으니 너무 걱정 마시게"

안쓰러워하는 내 시선과는 달리 아주 홀가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쉽지도 않다고 했다. 처음 시작했던 직장에서 별 탈 없이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이제는 좀 쉬고 싶다고도 했다. 긍정적인 남편의 말에 수긍하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인데 그동안 고생했다며 꼭 안아줬다. 요즘은, 누구에게나 오고야 마는 일들이 내게도 생긴다는 것을 겸손하게 깨닫게 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선인들의 말과도 겹쳐진다.

35년간 가족을 위해 묵묵히 희생해온 아버지를 위해 퇴직 몇 달 전부터 아이들이 퇴직기념 계획을 세웠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직원들과 아버지의 지인들을 초청하여 함께 크게 축하해주자고 했지만 사회 분위기는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해 아이들이 직장에 휴가를 내고 큰아들의 지휘 아래 제주도 2박 3일의 가족 여행을 하기로 했다. 첫날 첫 번째 관광지인 금오름에 올라 자연 속에서 제주의 바람을 맞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됐다. 아이들은 열심히 우리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고 동영상도 촬영하기 바빴다. 여행 둘째 날 숙소로 돌아온 저녁에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명예로운 퇴직과 다음날 맞는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축하파티 준비로 분주했다.

먼저 남편 몰래 준비해 간 현수막을 유리창에 붙이고 조촐하게 한잔 나눌 수 있는 술상도 마련했다. 아이들이 준비한 기념패에 금으로 남편의 사진을 넣어 장식한 '장한 아버지상' 기념패를 큰아들이 읽고 전달했다. 뿌듯한 감동을 연신 짧은 감탄사로 표현하는 남편. 아내에게는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으로, 아이들에게는 친구처럼 다정한 아버지로 잘 살아온 그는 이 자리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올해의 생신이 곧 철도의 날이기도 하네요. 오늘만큼은 아빠의 퇴직과 생신을 축하하는 의미로 경적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 달리는 기차 안에서 근무지를 지나칠 때면 아빠의 모습을 보기 위해 유리창에 매달려 밖을 주시하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 짧은 순간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으로 보아 행복했던 기억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아들이 준비한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막둥이가 두 장의 편지를 읽었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아버지의 명예로운 퇴직과 지나온 세월을 존경한다는 아이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진심을 다해 한명씩 돌아가면서 뜨겁게 아버지를 포옹해 주는 장성한 아들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흐뭇하고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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