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세탁기에서 막 꺼낸 것 같은 구름이 하늘 끝에 매달려 있다. 요 며칠 잦은 비와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이 한결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시원한 커피 한 잔에 망중한을 즐기기 딱 좋은 날씨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여유가 없다.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이는 주말인지라 밀린 청소도 해야 하고, 솜씨를 부려 밑반찬도 만들어야 한다. 팔을 걷어 부치고 부지런을 떨어본다. 땀으로 샤워를 해가며 드디어 대청소를 끝냈건만 영 산뜻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의 아킬레스건이다.

오래 살기도 살았다. 한 아파트에 15년 살고 있는 이 고집은 뭔가.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에 대한 회의는 전혀 없었다. 아이들 학교도 가깝고, 은행은 물론 장보기까지 수월해 불편함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입지이다. 그렇게 소박하게나마 '즐거운 나의 집' 예찬론자로 살아오던 내게 부동산 시장의 요동은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신축 아파트가 불과 몇 달 만에 억대가 올랐다는 소식은 이제 지방에서 조차 심심찮게 들리는 씁쓸한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세상이 정말 요지경 속이다. 성냥갑처럼 쌓여있는 고작 몇 십 평의 공간이 수십억을 오간다니 말이 되는가. 그에 비해 하루가 다르게 '낡은 아파트'의 꼬리표가 부각되는 우리 집을 보며 슬슬 투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고공 행진하는 집값 앞에서 단지 금전적인 계산으로만 속이 상한 게 아니다. 진짜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았다. 알뜰하게 모아 통장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다독이며 감사를 잊지 않고 살았다. 투정 없이 잘 자라주는 기특한 딸들은 우리 인생의 덤이었다. 그렇게 공들여 쌓은 탑이 껑충껑충 뛰어오르는 집값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에 억울한 마음까지 든다. 시류에 민감하지 못해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나의 무능함도 떨칠 수가 없다,

심란한 마음 탓일까. 주말 오전이면 사다리차를 대동해 신고식을 하는 새 입주민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오르내리는 사다리를 망연히 바라보다 문득 '이젠 낡아 갈아입고 싶은 옷처럼 투덜대던 이 집이 저들에겐 희망의 시작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처음 내 집 마련했을 때의 감흥이 살아나 주책없이 눈물이 그렁거리기도 한다.

'그래, 너무 두리번거리지 말고 살자.' 여기서 우리 아이들이 한 뼘씩 자라고 가족의 꿈이 영글던 기억들을 꺼내 보자.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이제 우리 부부만이 덩그러니 남은 집이지만, 추억과 위로가 함께 했던 보금자리였다. 그래서 더 이 집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비록 집값은 뒷걸음질치고 있지만,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마트를 향해 직진한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둘러앉을 저녁 밥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서둘러 마트를 다녀오느라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다. 장바구니를 잠시 내려놓고 아파트 화단에 서 본다. 오래된 만큼 그늘이 깊어진 느티나무가 볕을 가려 한낮의 더위를 밀어내 주고 있다. 오롯이 내 편이다. 오래된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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