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나의 할머니 이름은 김갑례이다. 구한말에 태어나신 분이니 그 무렵에 흔한 이름이다. 그 아래로 동생들이 줄줄 있으니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에서 갑을 따왔을 것이다. 갑례. 지금 보면 촌스런 이름인데 그래도 당대의 지식이 들어간 이름이니 당대에 흔한 이름 중에 상석에 속할 것도 같다.

나는 김갑례 그 이름이 좋다. 나의 할머니는 김옥희나 김미란, 김수잔나 여서는 안된다. 나는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를, 김갑례에서 해방된 한 존재를,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를 그 이름에 붙박아 놓는다. 그만큼 나는 이기적이다. 에구. 저 녀석. 천상에서 이제는 김갑례 아닌 어떤 존재가 고집불통 손자인 나를 보고 빙긋 웃으실 것도 같다.

최근에 페북에 올린 글이다. 올리기가 뻘쭘했는데 반응이 좋은 편이어서 약간 의아했다. 개인서사 성격이 강한 글이다. 김갑례라는 어휘가 나의 세대나 윗 세대에게 향수를 자극했을 것 같다. 짧은 글 속에 부드러운 반전이 있어서 읽을 맛도 없진 않을 것 같다.

'미시사(微視史)에 대한 생각을 나는 오래 전부터 해왔다. 물론 그에 대한 연구가 이미 학계에서 상당히 진척되었을 것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 구체화가 덜 되었을 것이다.

거시사의 빛과 그림자가 있을 것이다. 나의 저 글이 미시사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불티 정도는 머금고 있지는 않을까 과장된 생각도 해본다. 미시사가 풍부하냐 빈약하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격과 나라의 건강, 민도 등에 차이가 생길 것이다.

자기 가족사건 이웃의 개인사건 이런 미시사에 밝으면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에서 허구한날 떠들어대는 이야기의 구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미시사는 친밀도가 크기에 흥미 요소가 많고 풍요로울 것이다.

하나의 역사 담론이나 그 구성 방법, 창작 경위 등이 소박한 형태로도 스며들기에 역사를 상대화시킬 안목이 길러진다. 그러기에 주어지는 기존의 역사학이 기만술인지 진실인지 알아차릴 조건이 된다. 미시사는 그처럼 중요하며 그러기에 그에 따른 효과가 많을 것이다.'

나는 저 페북글에 대한 호응에 필을 받아 할머니와의 추억 한 토막을 또 포스팅했다. 제목을 '나의 최초의 자살 시도'로 정했다. 내용은 이렇다.

'예닐곱 살 때던가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그 전에 감을 먹었는데 떫었다. 툇마루에 함께 앉아 있던 할머니가 감 한개만 먹어. 두개 먹으면 죽는다 했다. 무엇 때문이지 화가 무척 난 나는 할머니 손에 있는 감을 부리나케 뺏어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지상을 하직하는 순간이라 닭똥물 같은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할머니가 내 입에 손가락을 넣어 남은 감을 부랴부랴 빼주며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에구 이 녀석아 하며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페친 한분이 댓글을 달아 주셨다. 김갑례 같은 향수를 자극하는 자신의 할머니 존함을 소개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페친들끼리 할머니나 할아버지 성함 말하면서 유래를 적는 릴레이 해도 재밌겠네요. 내가 단 답글이다.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다. 이 시대의 문화 유통 채널의 하나가 된 페북에 향수 어린 미시사의 강물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과거라는 오래된 미래를 비추고 그에 담긴 놀라움들을 현실화시킬 가능성을 품은채 말이다. 거시사의 폭력을 서서히 약화시키고 일상의 건강을 담지할 미려한 강물의 하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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