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화창하던 날씨가 어둑해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여우비 같지만 급한 마음에 양산을 펼쳐 들었다. 비를 덜 맞으려 작은 양산 속에서 아들 팔짱을 꼈다.

가지런한 초록빛 잔디 위 주홍색 능소화, 배롱나무꽃이 갑자기 내린 비에 오소소 떠는 것 같았다. 맨드라미 빨간 깃도 더 쫑긋해졌다. 여름 풍광을 바라보느라 설레발치는데 양산이 내 쪽으로 거의 기울어져 있다. 순간 아들과 눈이 마주쳤다. 내게도 이런 순간이 오는구나.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났다.

친정집에 잠시 둥지를 틀었을 때 쌍둥이는 네 살이었다. 비만 오면 발가벗고 온 동네를 천방지축 뛰어다녔다. 혼자서 둘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포기하고 이웃집 처마 밑에서 비를 긋는 수밖에. 발밑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낙화하는 빗줄기에 흙이 깊게 파인다. 동그라미는 파문을 일으키고 속도가 빠를수록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커진다.

어느 결에 왔는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머리를 갖다 대고 깔깔거리며 웃는 쌍둥이. 동네 사람들은 귀한 자식 방목해서 키운다며 허허 웃곤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컸을까.

아픈 추억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긴 인생길에 여름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처럼 내게도 큰일이 닥쳤다. 명암저수지에 차를 세워놓고 빗살을 얼마나 바라보았던가.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내리꽂는 비의 줄기, 비의 전면을 온몸으로 느꼈다. 녹음을 머금은 초록빛 차창 위로 땡글땡글 사념들이 매달렸다. 저수지에 물방울을 튕기며 장엄하게 떨어지는 빗살이 내 가슴에 그대로 박히는 듯했다.

한줄기 빗물처럼, 스쳐 가는 여우비처럼 행복해지리란 바람과는 다르게 자꾸만 엇갈렸던 인생길. 그런 힘든 삶에도 비 갠 뒤 하늘에 수놓은 무지개처럼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웃을 수 있던 날들. 그땐 초등학생이어서 내 돌봄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산 하나를 둘이 쓰고 인생길을 가다 보면 누군가 어깨는 젖게 마련이다. 둘이서 양쪽 어깨가 젖을 수 있고 우산을 든 이가 우산을 기울이면 본인의 어깨가 다 젖을 수 있다. 내 오른편 어깨가 젖을 때 나와 반대한 방향을 적시며 함께 갈 사람이 있다는 것. 세찬 빗살을, 인생에 몰아치는 장맛비를 같이 맞아 줄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 일터.

혼자 쓰는 우산은 바로 서 있고, 어깨가 젖을 일이 덜하겠지만 거센 장대비를 나 혼자 견뎌야 한다. 누군가와 함께 쓰는 우산은 아들이 내 쪽으로 양산을 기울였듯이 소중한 누군가를 향해 살짝 기울어 있음을 보여준다. 비록 어깨가 비에 젖을지라도 어려움을 같이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고 했다. 함께 비를 맞는다는 것은 마음을 헤아리며 곁에 있다는 의미가 크다. 상대방과 같은 처지에서 같은 마음을 느껴보는 것. 마음결을 맞추어 나란히 걷는 것이다.

팍팍한 가슴에 장대비가 거세게 몰아칠 때는 힘이 들었는데, 이제는 우산을 기울여주는 아들 곁에서 잠시 쉼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오늘처럼 비가 오면 우산을 같이 쓰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꽃을 만나면 꽃잎에 앉아 보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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