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아침 산책길, 들길을 걸으며 낮은 키로 수줍게 피어있는 꽃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름도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운 양지꽃이다. 또 지나치다 만나는 애기똥풀꽃, 그 꽃을 보면 귀여운 외손자의 똥이 떠오른다.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신기한 외손자는 노란 똥까지도 신통하고 이쁘다. 요즘은 또 망초꽃이 한창이다. 무엇을 그리 잊어야만 하기에 이름마저도 망초였을까, 애잔하고 애달프다. 무리지어 피어있는 망초 무리들을 보면 목까지 차오른 그리움이 거꾸로 토해져 올라온 그리움의 토사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지꽃, 애기똥풀, 망초… 이름들을 불러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고의 확장이며 관계의 확장이다. 그와 나의 관계의 확장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부터 이 꽃들과 나의 관계는 시작된다. 양지꽃 핀 양지바른 언덕에서 고운 햇살에 가만히 나를 맡기고 싶다는 생각, 애기똥풀의 사랑스러움, 망초무리들의 하얀 그리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갔을 이들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 특별한 의미로 나를 향해 웃음 짓는다.

김춘수 시인도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꽃' 중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존재들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 관계 없는 무의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의미를 부여하는 첫 단계,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다.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사물은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되고 의미를 얻게 됨으로써 존재가치를 지니게 된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남자 방송인이 80대 노여배우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 결례를 무릅쓰고 "00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호칭을 들은 노배우가 뜻밖에도 그렇게 좋아하시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연세쯤이면 어르신, 선생님, 선배님으로 불리워졌을 텐데 뜻밖에 자신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신선한 느낌에 매우 즐거웠다고 하시더란다. 엄마, 아내, 선배 그 어떤 것도 아닌 자연인 '나'를 일깨워주는 이름의 힘이다.

종종 아들 녀석은 나를 "영옥씨~", "영옥~!" 하고 부른다. 제 누나와 남편까지도 '엄마에게 버릇없이'하고 나무라지만 아들은 꾸준히 나를 그렇게 불러준다. 아들이 불러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 녀석이"하고 가볍게 눈을 흘기긴 하지만 싫지만은 않다. 아들이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들을 때마다 아무에게도 구속되어있지 않은 나로 돌아간 느낌이다. 내 존재의 본질은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이름을 불러보자. "여보, 당신"도 좋지만 때로는 남편의 이름을, 아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보자. 그 순간, 새로운 관계 형성이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지속했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너의 본질을 인정하겠다는 이름 부르기는 그저 덤덤했던 결혼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번진다.

이 세상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모습에 알맞은 이름들이 있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이름을 불러줄 때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다. 풍요로운 사고를 하고 싶다면 이름을 알려고 노력하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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