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여름도 어느덧 지나가고 있다. 이육사 시인이 광야에서 읊었던가. 끊임없는 광음을 계절이 피어선 지고…. 그렇다. 모든 것은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어느 날 페이스북을 보다가 페친이 지리산을 5년 만에 다시 올랐다는 소식을 접했다. 생생한 사진과 함께. 아, 지리산! 지리산 하면 그때가 떠오른다. 대학 2학년 때 친구와 단둘이 노고단으로 향했던 그 시절. 뒤통수까지 올라오는 큰 배낭을 둘러메고 지리산을 종주해 보겠다고 나섰다. 오직 도전 정신으로 무장한 채 헉헉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노고단에 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저녁 어스름. 벌써 많은 사람이 올라와 텐트를 치고 밤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도 얼른 텐트를 치고는 휴식에 들어갔다. 근데 심상치가 않았다. 노고단 산장에서 방송이 들려오는데, 오늘 밤 폭우가 예상되니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바람이 불고 가까운 산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찌나 피곤했던지 눕자마자 잠에 떨어졌다. 일기예보는 정확했다. 한참을 자는데 등짝에서 뭔가 찝찝한 느낌이 올라왔다. 앗, 차가운 빗물이었다. 결국은 꿀잠에서 깨어버리고 말았다. 비바람에 텐트가 날아갈 듯했다. 이 상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비정상이었다. 나는 일어나 멍하니 앉아서 비가 멎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와, 근데 옆에서 함께 자던 친구! 이 친구는 꼼짝도 안 하고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코까지 드르릉 골면서. 친구는 그때 노장 철학에 심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래서 그랬나. 암만 그래도 그렇지, 차가운 빗물이 올라와 몸이 그 위에 뜰 지경인데 잠을 자다니! 물아일체는 아닐지라도 어쨌든 한 경지를 하는 친구였다. 아침이 되어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너도 피곤해 봐!'라고 말하면서.

노고단 산장에서 다시 방송이 흘러나왔다. 등산객은 모두 하산하라고 했다. 앞으로 이삼일 간 더 비가 온단다. 2박 3일 일정을 잡고 지리산을 종주하기로 한 그 계획은? 어쩔 수 없었다. 하산하기로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뚜벅뚜벅 내려오는데, 어디서 팬텀기 같은 웅장한 소리가 들린다. 앗, 그건 계곡 물소리였다. 계곡을 건널 수 없어 망연자실해 있다가 물이 좀 빠지는 틈새를 보아 건너기 시작했다. 그때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좀 불안한지 서로 손을 잡고 건너자고 제안했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중간쯤 건널 때였다. 앗, 나와 손을 잡았던 여인이 으악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팍 안기는 것이 아닌가. 와, 그때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라면 둘 다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을 것이다.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지리산!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하여 지리산이다. 논어 옹야편 21장에,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그래서 지리산은 그 많은 물을 품고 있는가.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산다. 그중 무엇을 취할 것인가. 기왕이면 둘 다 취해 볼 일이다. 아, 젊은 날의 지리산이여! 그날의 짜릿한 공포는 다 어디로 날아갔는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