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조영의 수필가

할미꽃은 딱 한 번 굽은 허리를 편다. 씨앗을 퍼트릴 때다. 실 가닥 같은 하얀 털을 날리기 위해 꽃대를 세우고 바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숨은 결연하다. 사납든 약하든 강하거나 여려도 세상의 모든 모성은 가장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생명을 탄생시킨다.

베란다 화분에서 자라는 화초 중 하나도 일 년에 한 번 줄기를 곧추세운다. 꽃이 필 때다. 여름 뙤약볕에 죽어가듯 말라가고 힘없이 늘어졌던 줄기가 위로 솟으면, 사이사이 올라오는 꽃대가 보인다. 그때부터 변화 속도는 빨라지고 고요하던 화분은 얼마 동안 소란스러워질 것이다.

샤프란이란 이름을 정확히 알기까지 야생화 줄 난으로만 알았던 꽃은 가을이 시작될 무렵 꽃을 피운다. 줄기가 가늘고 길어 늘어지고 겉 줄기는 금방 말라서 화분 주변이 지저분하다. 관엽식물처럼 공간을 멋스럽게 꾸며주는 독특한 잎사귀 모양이나 색깔의 매력도 없고, 공기를 정화해주지도 않아 관심을 끌지 못한다. 항상 지쳐있듯 생기도 없다. 정리하고 싶은 하나를 꼽으라면 가장 먼저 선택하고 싶은 식물이다.

그러나 오래 겪어보면 투박하지만 정겹고 단아한 꽃의 아름다움에 빠진다. 까다롭지 않음이 으뜸이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햇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흙이 마르면 물주면 되고, 물주면 다시 생기를 얻는다. 환경에 민감하지 않아 어디에서든 잘 자라는 강한 생명력은 믿음을 준다.

변함없음이 또 하나의 미덕이다. 처서(處暑) 즈음에 꽃이 피는데, 꽃대가 독특하다. 땅속에서부터 하나하나 분리되어 올라온다. 스스로 힘차게 올라오는 꽃대를 보면 폭염에 지친 마음이 위로되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올해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19 영향으로 모든 경기가 무관중으로 치렀다. 관중 없이도 경기를 잘 치러 기쁨을 안겨준 선수들처럼 홀로 꽃피어 때를 알려주어서 대견하다.

꽃도 성격이 있다. 먹물을 머금은 붓처럼 통통한 꽃봉오리가 정적이라면 흰빛 여섯 장 꽃잎은 동적이다. 농염한 수술과 마주하고 수런대며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담박하지만 기품 있고, 순해보지만 어떠한 고난도 견디어 낼 의지가 보인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꽃향기도 날아온다. 첫사랑이 생각나는 향기다. 기억은 있는데 형체는 없고, 그립지만 돌아서는 아련한 지난날 시간을 불러온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애틋하여 꽃의 유혹에 빠져드는지도 모른다. 저녁 그늘이 짙은 걸 보면 가을로 접어들었다. 샤프란 꽃이 활기차게 움직이는 계절이다. 우리 집 베란다도 다시 꽃빛으로 따사로워 질 것이다. 내 마음도 꽃봉오리처럼 부풀어 오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