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담배꽃이 피었다.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추억의 꽃이다. 잎사귀는 다 따버린 빈 대궁위에서 연분홍 꽃이 만개해 넓은 꽃밭을 보는 듯하다. 꽃숭어리를 끌어다 자세히 보니 야들야들한 꽃잎에 비해 꽃술은 단단했다. 꽃술을 꽃과 분리하자 손이 진득하다.

담배꽃이 필 때면 꽃대를 딴다. 영양분이 꽃으로 가는 걸 막아 담뱃잎이 더 잘 크도록 하기 위해서다. 잎을 위해서 꽃 피우기도 전에 잘린 꽃대들. 그 때문에 담배꽃이 활짝 핀 것을 보기가 쉽지 않다. 농사를 마치고 난 뒤, 버려져 있는 밭에서나 만날 수 있다. 담배 농사에 얽힌 어린 시절 추억은 유쾌하질 않다. 이른 봄, 일요일이면 모종을 심어야 했다. 담뱃잎이 크면 넓적한 잎사귀 사이에 난 조그만 순을 치고, 꽃대도 따서 거름이 되게 밭고랑에 버린다.

한창 꽃필 시기에 인생이 희생된 큰아버지가 계시다. 아버지는 공부를 안 가르쳤어도 맏이인 큰아버지는 사범학교에 다니셨다. 그러다가 의용군으로 끌려가셨다. 카키색 가방과 필통을 주인 생사는 몰라도 아버지는 오랫동안 보관하고 계셨다.

담배는 한여름에 수확했다. 잎에 샘 털이 밀생하여 끈적끈적하다. 밭고랑에 들어갔다 나온 아버지의 옷은 찐득찐득한 담뱃진 범벅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에 땀으로 흥건한 데다 새카맣고 찐득하니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담뱃순은 쳤어도 담뱃잎 따는 것은 어린 자식들에게는 시키지 않으셨다.

수확한 담뱃잎을 여자들은 새끼줄에 하나하나 꼬아 끼웠다. 남자들은 길게 엮은 담뱃발을 한증막보다 더 더운 건조실 천정에서부터 차례로 묶어 내려온다. 그날부터 건조실 아궁이에 석탄을 물에 개어 불을 땐다. 사나흘 꼬박 새워가며 불을 조절하여 담뱃잎을 익힌다. 며칠 후 건조한 잎은 노랑과 주황 중간색이 된다.

여름방학이면 조리를 했다. 늦잠을 자고 싶고 놀고도 싶은데 일 하라고 자꾸만 부르니 담배 농사가 싫었다. 말려서 뭉쳐놓은 잎사귀를 털어서 떼어내라고 시킨다. 품앗이로 조리를 하는 아주머니들은 떨어뜨려 놓은 담뱃잎을 크기별로 색깔별로 손가락 두 마디만큼 묶는다. 이 묶음을 다시 모았다가 궤짝에 넣고 밟아 큰 뭉치로 만들었다.채송화씨보다 더 작은 알갱이, 미미한 짙은 갈색의 담배 씨앗이 잎은 제일 크게 키워냈다. 어찌 보면 내가 이만큼 성장하게 키워 준 부모님 같다.

담뱃잎은 담배의 주원료가 된다. 아버지는 건조실에서 나온 잎을 잘게 썰어서 종이에 말아 피거나 곰방대에 넣어서 피우셨다. 바쁜 농사철에 잠깐 일손 놓고 한 대 피우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젊은 시절 헤어져 만나는 건 고사하고 생사를 모르는 형님의 안부를 궁금해 했을까. 어떻게 하면 육 남매를 반듯하고 남부럽지 않게 키울까 고심하셨을까.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꽃은 맺었으나 제 몫을 다 못하고 밭고랑에서 시들어가는 담배꽃. 인생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농사일만 하시다 가신 아버지 같은 꽃이다. 형에게 밀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한평생 농사일로 뼈 빠지게 일한 당신은 결국 잎을 위해 밭고랑에 버려진 담배꽃이 아니었을까. 담배꽃을 보니 끈끈한 진액이 묻은 옷으로 묵묵히 일만 하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