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아내 생일이었다. 저녁에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살림을 난 딸이 손녀를 데리고 왔다. 사위만 직장 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작은 케이크를 놓고 생일축하노래를 불렀다. 그때, 손녀가 조금은 곤란하다는 투로 "나 이 노래 못하는데…"라고 말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딸들이 이튿날 아침으로 미역국을 끓인다고 시장을 봐왔다. 함께 갔던 손녀에게 시장에서 무엇을 샀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난 잘 모르는데…"라는 답을 내놓았다. "~는데…"는 제 어미가 자주 쓰는 말투다.

모른다는 말을 사용하는 게 재밌다. 그날 사온 것들이 미역과 소고기였으니 아이가 기억하기는 무리였을 게다. 꽤 오래 전에는 사오 년 전 사진을 보여주고 엄마를 찾으라고 한 적이 있다. 그 사진에는 제 어미가 사진을 찍느라 빠지고 없었다. 손녀는 한참을 보고도 찾아내지 못했다. 엄마가 함께 있는 사진에서는 금방 찾아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아니라 해도 비슷한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짐작으로 고르는 게 얼마나 많고 자연스러운가? 모르는 것을 추측으로 아는 것처럼 표현해 알고 모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구구셈처럼 분명한 게 아니면 그런 현상은 더욱 힘을 얻는다. 우리 사회에 참보다 거짓의 목소리가 더 큰 건 아닌지 염려다. 분명한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강하게 발언하면 반박이 쉽지 않다.

간혹 TV 퀴즈프로그램을 본다. 부저를 누르고 답을 맞히지 못하면 감점이다. 극적인 재미를 주려는 의도겠지만 한 문제에 순위가 요동친다. 모르면서 짐작으로 하나를 고르는 것과 모른다고 하는 걸 같다 할 수 있을까?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가 다른 아테네 사람들보다 지혜로운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데 있다고 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까? 손녀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 것은 특별히 정직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지적 수준이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일게다. 거짓말은 고도의 사고과정을 거쳐 나온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는 것은 복잡한 상황을 파악한 후의 결론일 게다.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하나'를 고르는 게 더 이익이다. 십 수 년 받아온 교육의 결과다. 학생들을 가리켜 '시험기계'라고 한다. 시험에 잘 적응해 점수를 잘 받는데 익숙하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지선다형 혹은 오지선다형에 길들여져 있어서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면 손해다. 몰라도 그럴듯한 답을 골라야 유리하다. 틀려도 감점이 없어서다. 짐작으로 답을 고르기보다 모르면 모른다고 답할 수 있다면 어떨까? 잘못된 답에 감점을 하면 더 정확한 평가와 도덕교육이 함께 되지 않으려나?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허세가 늘 통하는 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얼마가지 않아 편안해진다. 더 이상 눈치 볼 일도 없고, 언제 어떻게 행동했던가에 고민 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이제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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