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세월따라 삶의 모양과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친정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일가친척 없는 서울에서 생계를 위한 장사를 시작하셨다. 젖도 떼지 못한 어린 애기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 고생하신 어머니의 이야기는 밤 새워도 끝이 없다. 그 시절 제법 산다는 사람들의 도시락 반찬으로 뎀뿌라와 쏘세지가 잘 나갔던가 보다. 한국냉장에서 물건을 갖다 주는 대로 팔았는데 매상이 제법 높았었나보다. 한냉아저씨는 우리 가게에 오실 때마다 종합 선물세트나 케익을 사 오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 아저씨가 수금하러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던 달콤한 기억이 있다. 시장은 부모님 삶의 터전이었고 무에서 유를 만든 디딤돌이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서 사남매를 키우며 살림을 일으켰고 집도 사고 땅도 사며 자수성가를 이룬 곳이다.

시장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때는 온 종일 시장통을 뒤집고 다녀도 피곤한 게 뭔지 몰랐다. 야간 자율 학습시간이면 친구들과 간식 값을 걷어 신촌 시장에 가서 떡볶이 튀김 순대 호떡을 사온다. 그 날 밤 교실은 여고생들 웃음꽃이 가득 피어나는 먹자판이 된다. 토요일 오후면 친구따라 남싸롱 가자하면 남대문 시장으로, 동싸롱 가자하면 동대문 시장 이태원 보세시장으로 우르르 몰려 다녔다. 삼삼오오 가시나들의 시장놀이는 쇼핑이기보다는 안목을 높인다며 몰려다니는 놀이터였다.

시장에 가면 열심히 쌀아가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남대문 시장 리어카 좌판대 스피커 음악에 "골라 골라!"손과 발로 박자를 딱딱 맞추는 기막힌 재주가 놀랍다. 여기저기 들려오는 손님 유치작전의 익살스러운 멘트는 이미 시작된 전쟁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 속에 밀고 밀리며 보물섬 같은 신기한 물건들을 보는 재미에 저절로 발길이 머문다. 그곳은 서민의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시장이다. 꿈을 향한 오늘의 힘겨운 노동괴 희망이 있기에 서민들의 공감대가 만들어지는 곳이 바로 시장이다.

언제 어디서든 사고 싶은 것은 부담 없이 쉽게 살 수 있던 익숙함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아담과 이브의 만남으로 충청도 면단위 조그만 마을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마주 한 장터는 물건을 가득 실은 요란한 경운기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2일과 7일이면 어김없이 장(場)이 서는 오일장(五日場)이었다. 난전이 펼쳐지면 농산물과 가축들 사람들이 함께 밀고 밀린다. 과일. 야채. 어물. 잡화. 가축장으로 붐비는 장터 길목에 주름진 손과 때 낀 손톱, 그을린 얼굴에 주름살 가득 패인 할머니의 채소들이 손짓한다."새댁 이리와 봐요"이가 다 빠진 할머니는 손주들 책이라도 사 줘야한다며 깨끗이 다듬은 열무를 권하신다. 꼭 필요해서 보다는 인정에 끌려 장바구니에 담는다. 할머니는 그 위에 쪽파와 호박 따듯한 마음까지 얹어주신다. 덤 속에 담긴 정(情)이 만나면 반가움을 더한다. 어쩌다 할머니가 안 보이면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은근 궁금해지기도 했다. 봄에는 봄나물이, 여름엔 신선한 야채와 풍성한 과일이, 가을엔 감이 많이 나는 곶감 장이. 한가롭고 스산한 겨울 장까지 시골장터의 사계(四季)를 보냈다. 새 봄 신혼부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오일장과도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동네시장에서부터 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면 대형마트와 백화점, 토요장터, 게라지 세일, 로컬푸드까지. 시장 풍경과 장터 문화가 계속 달라진다. 손가락 하나로 까딱하고 결제하면 다음 날 새벽 현관문 앞에 배송된 재료로 아침 식탁을 차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친정아버지 삶의 터전이었던 흑석동 시장, 친구들과의 놀이터였던 신촌시장 남대문시장,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정을 담아주던 할머니의 장터.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날의 아련한 추억과 풍경은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사라져가는 오일장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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