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서정석 공주대 박물관장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이하여 문화재청과 공주시는 올해를 아예 '무령왕의 해'로 선포했다. 한햇 동안 내내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해로 삼겠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실제로 무령왕릉은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무령왕릉이 얼마나 귀중한 문화유산인가 하는 것은 공주, 부여, 익산의 백제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만으로도 훌륭하게 입증된다. 더구나 공주, 부여, 익산에 있는 백제유적이 다 중요하지만, 그것이 세계유산이 된 데에는 무령왕릉이 적어도 절반의 역할은 했다는 생각이다. 무덤의 주인공을 알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을 통해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 교류의 실상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 아는 것처럼 이 훌륭한 문화유산을 하루 밤 만에 조사하고 말았다. 일생 일대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한 역사적인 순간이 눈앞에 펼쳐지자 '머리가 돌아버려 발굴의 ABC'를 잊어버렸노라고 발굴을 담당하신 분은 회한에 찬 회고를 했다.

사실 이 땅에 발굴이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그래서 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이뤄지고는 있었지만 정작 이 땅의 연구자들은 발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해방을 맞이했을 때 발굴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죽하면 발굴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귀국하려는 일본인 연구자를 붙들고 늘어졌을까.

그러한 일본인 연구자도 무덤 하나를 조사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무덤 하나를 조사한 경험으로 이 땅의 모든 유적을 조사해야 했던 것이다. 공롭게도 곧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후에는 보릿고개를 넘느라 유적을 조사해 볼 기회를 좀처럼 가져보지 못한 채 운명의 1971년을 맞이했다.

그래서 무령왕릉이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모두가 준비가 안 된 생태였다. 왕릉 내부를 조사하기에 앞서 사진을 찍으라고 언론에 공개한 발굴단이나, 사진 찍느라 왕릉 안에 놓여 있던 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린 언론이나 미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발굴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던 시기에 빚어진 촌극이었던 셈이다.

다행히 무령왕릉 발굴을 계기로 발굴 전반에 대한 반성이 일어 발굴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단순히 양적으로만 팽창된 것이 아니라 발굴 수준도 높아져 이제는 71년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게 됐다.

문제는 유물을 잘 수습해 내는 것이 발굴의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릉 안에 있던 유물을 잘 수습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은 더 중요하다. 수습한 유물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것을 부장한 이유를 알 수 있고, 또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당시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발굴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지 연구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데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서정석 공주대 박물관장
서정석 공주대 박물관장

'졸속' 발굴에 대한 회한에 찬 반성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게으른' 연구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발굴하지 5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출토유물이 5천232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동안 연구하는 사람을 양성하는데 얼마나 소홀했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무령왕릉은 세계유산이다. 지키고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유적임을 전 세계인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령왕릉 전문 연구자를 갖는 것이야말로 세계유산 무령왕릉에 대한 예우이자 그 중요성을 인정해준 세계인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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