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구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하늘이 흐려지고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저녁 어둠이 깔리듯 세상이 컴컴해진다. 빗방울이 한둘, 앞 유리창에 맺히더니 거센 폭우가 되어 시야를 가린다. 두두 두두둑, 타다닥 타닥…, 차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요란하고 앞차가 흐릿하다. 도로 위는 어느덧 모 심을 논처럼, 물 흐르는 개울마냥 고인 물이 그득하고 쏟아지는 빗발에 정신이 산란하다. 주위가 어둡고 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웬만큼 거리를 두고 앞차만 따라간다. 익숙한 길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캄캄한 밤, 모르는 곳에서 이런 일을 당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어깨와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느린 속도도 빠르게 느껴진다.

얼마 전 내게 약한 폐쇄공포가 있는 걸 알았다. 가끔 긴 터널을 지날 때면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 같았다. 짜증이 솟다가 터널 끝이 보이면 진정되고, 햇살이 비치고 사방이 확 트이면 편안해졌다. 밤이면 불안이 더하다. 아주 익숙한 곳이 아니면 길을 헤맨다. 먼 곳을 갔다가 돌아올 때, 밤길은 내게 쉽지 않다.

다행이다. 주변이 컴컴하지만 낮에, 그것도 익숙한 곳이니 불안이 크지 않다. 안개가 떠가는 걸 본적이 있다. 지금은 퍼붓는 빗줄기가 안개처럼 떠간다. 부옇게 무리지어 가는 게 보인다. 긴 다리를 지난다. 비가 많이 내린다고 멈출 수 없으니 앞차 따라 천천히 간다. 다리 위는 더 겁이 난다. 이 와중에 몇 대가 빠르게 내 차를 추월해 질주한다.

다리를 건널 때쯤, 주위가 훤해진다. 먹구름이 벗겨져 하늘에 희고 푸른 공간이 보인다. 앞서 가는 차들이 또렷하고 차에 달린 여러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빗속에 씻긴 가로수가 산뜻하다.

문득 부모님이 보고 싶다. 아버지와 형들은 한 때, 곳곳의 장을 찾아다니던 장돌뱅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이들에게 비가 내려 장이 서지 않는 날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하늘이 원망스럽고 대책이 없었을 그 느낌의 한 부분이 전해져 온다. 그런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식이 날씨와 무관한 직업 갖기를 얼마나 바라셨을까? 오랜 세월이 흘러 부모님 마음 한 끄트머리를 잡고 죄스런 생각에 젖는다. 살아계실 때 단 한 순간이라도, 원하시는 모습을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내 무능이 한스러울 뿐이다. 목소리가 굵어지고 턱밑에 수염이 나듯, 정한 때가 되어야 깨닫는 게 있는가 보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요란하게 퍼부은 빗속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채 문으로 들어선다. 이게 좋은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사람도 생물인데 적당히 비를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어느덧 길가에 다시 햇살이 빛난다. 바깥과 달리 들어선 방안엔 평온함이 그득히 고여 있다. 빗속에 많은 변화를 겪고 다시 맞은 한낮의 평온에, 나른함과 권태가 밀려온다.

하루가 이틀 같은 날이다. 낮이 있고 낮 속에 밤을 살고 또 다시 낮을 맞고 머잖아 다시 밤이 오리라. 빗속에 컴컴한 시간들을 불안과 걱정이 겹친 심리적 밤이라 할 수 있으려나? 인생이란 긴 세월 속에 이러한 밤들이 예고 없이 다가와 나를 사색하게 하고 삶을 더 깊어지게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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