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 잔]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Jethro tull
Jethro tull

2009년, 당시 신한은행 과장이던 필자는 대전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새로 은행의 수장으로 취임하신 이백순 은행장님이 각 지역을 돌며 조찬 간담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필자도 초대를 받았고,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아침이나 먹고 오자'라는 마음으로 참석했다.

의례적인 순서가 끝나고 행장님께 자유롭게 궁금한 바를 질문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한 직원이 행장님께 '즐겨 읽으시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근에 읽었다는 몇몇 고개가 끄떡여지는 책을 말씀하시더니, 갑자기 사실은 무협지를 제일 많이 읽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학창 시절부터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장편으로 한 작품 정도는 쓸 수가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셨었는지, 사전에 비서실 직원들로부터 '오늘은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다면서 그래도 사실이니 해야겠다며 활짝 웃으셨다.

그 순간, 이백순 행장님과 필자 사이에는 은행장과 과장이 아닌 무협지를 좋아하는 같은 애호가로서의 동지애, 동질감 같은 것이 전율처럼 흘렀다.

그렇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무협지를 많이 읽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써도 될 정도의 수준'이 된지 오래였다.

Jethro tull
Jethro tull

'허공답보'나 '능공허도'처럼 유유자적 허공을 걸어 다니는 경지를 뛰어넘어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절정의 경신술이 나오고, 검을 자유로이 허공으로 날리는 이기어검의 경지가 등장하기도 하는 무협지 속의 세계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어린 소년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런 극강의 무공뿐만이 아니다.

초창기에 접했던 무협의 세계에는 무당파, 아미파, 소림파, 곤륜파, 공동파, 화산파로 구성된 6대 문파가 나오고, 호권, 웅권, 학권, 사권, 당랑권도 나온다.

이런 여러 가지 무공 중에서 어릴 때 가장 인상적인 무공은 '학권'이었다.

학권은 싸움을 준비하는 자세부터가 화려했는데, 두 팔을 하늘 방향으로 270도쯤 되는 각도로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모두 모아 뾰족하게 만든 다음, 팔목을 꺾어 내린다.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들어 왼쪽 무릎 위치에 붙인 모습이었다.

이안 앤더슨
이안 앤더슨

자세만 보면 굉장히 멋있지만, 내공이 부족한 필자로서는 한 쪽 다리로 서야 하기 때문에 불안정해서 그 자세에서는 공격은커녕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대중음악 세계에도 연주를 할 때, 외다리로 서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영국의 유명한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Jethro Tull의 Ian Anderson이다.

제쓰로 툴의 전성기가 1970년대이니, 서양 사람들이 무협의 세계를 알고 있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그들의 눈에도 이안 앤더슨의 이러한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외다리로 서서 풀륫을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여러 차례 앨범 표지를 장식했다.

이미 해가 져서 깜깜해진 밤, Jethro Tull의 연주곡 Elegy를 듣고 있자니, 이백순 은행장님도 생각이 나고, 어설픈 자세로 학권을 연마하곤 했던 어린 시절 필자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