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수필가·충북문학수필회장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혀있던 어느 날이다. 증평과 연이 닿으면서 아득히 잊고 있던 다락방 문을 열었다. 지붕 아래 제일 높은 곳, 천장 낮은 다락은 꿀단지와 잡동사니 골동품을 보관하던 방이다. 할머니의 삶이 숨어 있는 보물창고였다. 가끔씩 생쥐가 몰래몰래 드나들고 들창 너머로 햇살도 살짝 엿보아 들던 곳이다. 아이들이 숨어들고픈, 호기심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랬다. 우리에겐 나만의 비밀이 간직된 마음의 다락방이 하나씩 있다. 오랫동안 굳게 잠겨 있던 그 다락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묵은 먼지를 털고 나온 이야기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어릴 적 소꿉동무와 부모님의 이야기를 만난다. 이웃들과 얽힌 애환, 미래의 꿈도 툭툭 튀어나온다. 달달한 꿀단지다.

다른 사람의 일인 듯하면서도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두 공감하는 한편, 조금씩 색다른 삶의 양상에 또 다른 재미가 느껴진다. 때때로 배꼽이 옷섶을 헤집고 나와 웃음바다를 이루기도 하고, 흥건히 눈물 젖게도 한다. 다락방은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준 소중한 마음의 자산이다.

어린 시절 가슴에 머물던 그 추억이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다락방의 수필'이란 이름으로 증평군평생학습관에서 열어준 놀이마당이다. 마음 활짝 열고 나와 신명 나게 즐겨보라 추임새를 넣는다. 가슴 한 켠에 웅크리고 있던 너와 나, 우리들의 이야기가 슬며시 걸어 나와 햇발 아래 콩콩콩 여물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락방의 추억'을 엮은 이야기 집이 출간을 앞두고 마지막 기를 모으는 중이다. 새싹이 움터 오르던 봄부터 가을 국화가 만발하기까지, 긴 여정을 무던히 참고 견디며 꽃피운 결실이다. 송이송이 피워낸 사연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쉼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 하나를 얹으며 일행과 함께 보강천 변을 걷는다.

질펀한 사람살이의 향기가 물결을 타고 흐른다. 하늘로 기세 좋게 벋어 오르던 미루나무가 잠시 멈추고 숙연히 잎사귀를 떨군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만발하던 그 자리엔 어느결에 군락을 이룬 백일홍이 활짝 웃는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서 보던 그 꽃, 인연이다.

증평은 보강천 주변을 참으로 정성스럽게 가꾸어간다. 계절마다 다른 늘 아름다운 화원을 이룬다. 올 때마다 조금씩 색다른 모습을 보인다. 끊임없이 돌보고 있음이다. 물과 햇빛과 바람, 그리고 꽃과 나무, 사람이 조화로운 곳이다.

"애썼다" 여러 종류의 꽃과 어우러진 국화가 맏언니처럼 어깨를 토닥여 준다. 다양한 색과 모양으로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국화가 특히 마음을 끈다. 뒤늦게 글공부를 하며 이곳을 찾은 이들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완숙한 아름다움과 정이 넘치는 현장이다.

증평은 내가 살고 있는 진천과 두타산을 경계로 이웃하는 군이지만, 고구려 때는 금물노군이라 불린 지금의 진천군에 속했다. 그 후 고려 때는 도안현으로 부르다가 조선 시대에는 청안군으로, 일제 강점기엔 괴산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면이 개편되면서 증평이란 명칭이 쓰기 시작했고, 지금의 증평군으로 독립한 것은 2003년부터다. 진천과는 한 형제와 같은 곳이다.

김윤희 수필가·충북문학수필회장
김윤희 수필가·충북문학수필회장

우리가 글을 빚어내는 그 시간, 보강천 미루나무 숲도 쉼 없이 휴식의 장소로 거듭나고 있었나 보다. 마음의 쉼이 되는 수필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아름답게 깊어가고 있다. 삶이 여물어가는 소리가 맑게 들린다. 의식이 깨어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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