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 상자와 며칠째 눈싸움을 하다 결국은 소매를 걷어붙였다. 간식 몇 번 갖다 드린 걸 잊지 않고 경비아저씨가 애써 챙겨주신 걸 그냥 굴러다니게 둘 수 없어 모과청 만들기에 도전했다. '핸드메이드 모과청'을 만드는 일은 첫 단계부터 까다로웠다. 모과를 베이킹소다와 식초로 깨끗이 씻고 물기를 말끔히 닦아냈다. 자칫 물기가 남으면 골마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야물게 익은 모과는 손목터널 증후군이 있는 내겐 역시 난적이었다. 나름 각오를 하고 덤볐어도 칼끝에서 버티는 힘이 만만치 않다. 나중에는 꾀가 나서 납작썰기를 해 볼까도 고심했지만, 채로 썰어야 숙성도 빠르고 향도 잘 배어 나온다기에 채썰기로 끝을 보았다. 설탕과 채 썬 모과를 버무려 놓고 모과청을 담을 유리병 열탕소독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과 만나는 순간 유리가 깨지지는 않을까, 혹여 물기가 남지는 않을까, 입을 앙다물고 긴장한 모습에 좌충우돌 초보 주부일 때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났다.

몇 시간 씨름 끝에 완성된 모과청을 다섯 병으로 나눠 담았다. 칼을 잡았던 손마디에 슬슬 물집이 잡혀 왔지만, 나눠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만들어 그런지 만족감이 앞섰다. 보기 좋게 리본을 묶어 김장 때 모일 동생들에게 한 병씩 안겨 줄 생각이다. 모처럼 큰언니로서 폼나는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시집오기 전까지 동생 넷을 데리고 10년 가까운 자취생활을 했다. 뻔한 시골 살림에 5남매를 도회지로 유학시킨 부모님에 대한 보답은 묵묵히 동생들을 건사하는 일이라 여기며 살았다. 학교급식도 없던 그 시절, 매 끼니 5인분의 밥과 4개의 도시락을 싸는 일은 대부분 내 몫이었다.

부모 품을 떠난 객지에서 맏이의 노릇은 생각보다 무거웠기에 내 희생이 제일 컸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펼친 이야기보따리 속에서 나름 힘들었던 동생들의 속마음을 듣고 함께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한참 예민한 시기, 복작거리는 좁은 방에서 나름의 아픔을 감내하며 살았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감정들을 위로하면서 자매애는 더 끈끈해졌다. 어찌 보면 그 시절을 슬기롭게 이겨낸 우리들의 저력이 오늘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사는 자양분이 아닐까 하는 믿음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유난히 일찍 찾아온 찬바람에 조심스레 모과청 뚜껑을 열었다. 설탕이 녹을 때까지 더 기다려야 하지만 '맛보기' 명목으로 즙과 건더기를 떠서 약하게 끓여 첫 시음을 했다. 동생들 입에 잘 맞겠다 싶으니 몸이 한결 더 따뜻해 왔다. 그 떫던 모과가 2주 사이에 달달한 즙으로 우러나고 있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채썰기 하기를 잘한 것 같다. 잘게 다져진다는 건 생채기가 많아진다는 뜻이지만, 가끔은 그 생채기로 인해 더 소중한 것을 얻기도 한다.

손목이 아물 때쯤이면 모과청도 더 깊은 맛으로 익어가겠지! 그렇게 가끔은 떫은 게, 아픈 게 더 달콤해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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