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한 여인이 내게로 왔다. 그의 삶을 만나며 마음이 뜨거워졌고 가슴 저미는 안타까움과 슬픔 연민이 밀려왔다. 항일 단체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지만 독립 운동가를 내조하며 조국독립과 주권쟁취를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여인이다. 우연한 기회에 여성 독립운동가 전시관을 찾았다. 남성중심의 독립운동사에 가려진 여성 독립운동가 들의 삶과 사진 기록물을 볼 수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한말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 만세운동의 투사 어윤희. 독립운동가의 동지로 활약했던 박자혜, 오건해, 신순호, 이화숙 이루 다 열거 할 수 없는 충북의 여성 독림운동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외세침탈과 국권 강탈로 이어지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분연히 일어나 금가락지를 내놓고 일생을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일제와 맞섰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대한독립을 꿈꾸며 목숨 바쳐 싸웠던 수많은 여성들이었다,

연미당(延薇堂)은 연병환의 첫째 딸로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충효(忠孝)였다. 임시정부가 장사로 피난하던 시절부터 어릴 때 부르던 아호(雅號) 미당이란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부친 연병환은 구한말 관립 외국어학교를 나와 능숙한 영어 실력과 세무직의 경험으로 만주 룽징 해관에 근무하며 독립자금을 지원한 독립 운동가이다. 해외에서 처음 한인독립운동 기지였던 북간도에서 아버지의 독립정신의 영향을 받으며 자연스레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체득했다. 그녀는 상해 인성학교와 진강 여학교를 졸업 스무 살에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의 중매로 김구선생을 보좌했던 엄항섭과 결혼했다. 남편과 함께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임시정부를 지킨 여인이다.

독립 투쟁의 현장에는 언제나 여자들도 함께 있었다. 유교사상이 뿌리박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여성독립운동가 들은 오랫동안 소외당한 채 묻혀있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주춧돌을 놓은 임시정부헌장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계급 등 일체의 평등함을 선언하노라' 남녀가 국민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일본의 식민 통치아래 대한독립을 꿈꾸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국민적 결의를 만들었고 여성 참정권을 준 앞서간 정신이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던진 도시락 폭탄사건은 세계만방에 알려졌지만, 보자기를 만들어 도시락 폭탄을 싸주었던 연미당의 손길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남목청사건으로 김구선생님이 총상을 당해 생사의 위기에 있을 때 집으로 모셔 와 극진한 간호로 정성껏 보살핀 분도 연미당이다. 당시 김구의 거처를 알려주는 현상금이 60만원 이었다하니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가히 상상 할 수 없는 몸값이었던 분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 여인이었다. 김구선생은 임시정부 이동 중 생사고락을 함께한 연미당 가족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그녀는 자유한인대회 주최 항일 투쟁을 벌이다 광복을 맞이했고 6·25 때 남편이 납북된 이후 홀로 5남매를 키우며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하다 민족의 별이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만난 그 여인은 내 어머니 우리 할머니를 뵙는 것 같이 친근했고 따듯하고도 애절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대한독립을 향한 최선의 삶이 후대에 큰 영향력을 준 명예로운 인생으로 거듭 난 것이다. 해 같이 빛나는 연미당(延薇堂)의 삶과 보통 사람으로 살아온 내 인생을 돌아보며 진정 가치 있는 삶에 대해 물음표를 던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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