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이일주 공주대 명예교수

12월 7일 대설(大雪)이다. 24절기 중 21번째 절기로, 소설(小雪)과 동지(冬至)사이에 드는 절기이다. 음력으로는 11월에 들어서니 본격적인 겨울철이 시작되는 때이다. 눈이 많이 내린다는 절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음력 12월이 되어야 기온도 최하로 내려가고, 깊은 겨울에 들어서야 눈도 많이 내린다.

대설이 되면 낮의 길이는 가장 짧아지며, 동지가 될 때까지 밤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그러니 과거 농경시대 같으면 추수와 김장 등 월동준비를 마친 후의 농한기에 들어설 때이다. 땀 흘려 한 해 지은 노력의 결실로 곳간 가득 쌓인 곡식이 넉넉한 인심도 함께 쌓이는 좋은 절기이다. 기온이 점 점 내려가니 난방 준비, 동파 방지 등 등 본격적인 겨울 채비를 하는 때이다.

가을걷이를 마친 논과 밭에는 다음 해 6월, 옛날 배 주린 고통의 보릿고개를 넘겨줄 보리 싹들이 차지하고 있어 한겨울의 희망을 펼쳐줄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경시대에는 대설에 눈이 내려 보리밭을 덮어주면 동해(凍害)를 막아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

1795년(정조19)년 9월 공산성 공북루에 올라 '등(登)공주공북루'라는 시를 지었던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유는 농가월령가 중 십일월령에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쑬 일 남았구나",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인리(隣里)와 즐기리라", "등잔불 긴긴 밤에 길쌈을 힘써 하소", "자란 아이 글 배우고 어린 아이 노는 소리", "외양간 살펴보아 여물을 가끔 주소", "깃 주어 받은 거름 자로 쳐야 모이나니"와 같은 글을 남겼다.

이를 통해 대설에는 가을걷이 한 콩으로 메주를 쑤어 장(醬)담을 준비를 하고, 명일(名日)인 동지를 앞두고 팥죽을 쑤어 이웃들과 나누어 먹으며, 학동(學童)들은 부지런히 글 읽고, 부모들은 길쌈, 양축(養畜), 다음 해 농사 준비 등등의 바쁜 겨울 풍속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대설 절기의 이치나 사람 사는 모습은 시대가 많이 변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과거 어려웠던 대설 절기에는 비록 곤궁하더라도 내 할 일을 찾아 하며, 작은 음식으로도 이웃과 나누고, 추운 겨울에 또 내년의 풍요를 준비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모든 생명이 정지한 듯 혹독한 겨울에도 들녘의 보리 싹에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고, 어린 아이들 노는 소리와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에서 나라의 백년대계를 그려볼 수 있다.

오늘날 고도 과학 문명의 발달로 컴퓨터,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생활하기 어렵고, 로봇이나 드론 등 첨단 기기를 일상에서 사용하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들었으면서도 긴 겨울 밤 아이 우는 소리는 듣기 어렵고, 쾌적한 주거생활은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을 잃고 있으며, 먹거리가 남아돌아도 정을 나누는 인정과 배려심은 짧아지는 대설 절기 낮 시간처럼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무엇이 이러한 세태를 만들어 놓았는가, 긴 겨울 밤 차분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일주 공주대 명예교수
이일주 공주대 명예교수

이제 90일이 지나면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른다. 매일같이 유력 후보들마다 득표활동에 전념하고 있지만, 엄중한 코로나 시국이라서 그런지 인심도 꽉 닫힌 문과 같아 유권자들이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듯하다. 그 어느 때보다 심신이 고단한 세태에 맞는 대설(大雪) 절기에, 추운 겨울 얼어붙은 우리 이웃의 마음을 따스하게 해 줄 수 있는 기발한 공약(公約)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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