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모처럼 외출로 귀가가 늦어진 날이다. 일찌감치 퇴근해 왔다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베란다에 있는 감자 좀 깎아 놔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해 주면 감사, 안 해 주면 말고. 그런 마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해 놓고 서둘러 집에 와 보니 알토란 같이 깎아져 있는 감자가 싱크대 위에 정물화처럼 놓여져 있다.

기특하고 감사한 마음에 신랑 엉덩이를 툭툭 쳐주고는 감자채 볶음 뚝딱 만들어 잘생긴 총각김치랑 나물 몇 가지로 늦은 저녁상을 함께 했다. 예전 같았으면 후룩거리며 먹는 소리, 식사 후의 작은 트림에 잔소리로 눈 몇 번은 흘겼을 법한 상황이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예뻐 보이는 날이다.

남편에게 예기치 않은 병마가 찾아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는 열심히 살아온 값이 '병'으로 온 것 같아 원망의 마음이 앞섰다. 불안하고 억울한 마음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운 건 오히려 남편이었다. 잘 버텨주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가족들을 다독이며 버팀목이 되고 있다. 두 딸 역시 바쁜 직장생활 중에도 변함없는 애정과 응원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위기 앞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 단단히 묶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건강하고 풍요할 때 미처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행복이다.

내 주머니 속에 것들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중함을 모른 채 그 속에 다른 무언가를 더 채워 넣으려고 했다. 어리석게도 주머니 속엣것을 잃을 뻔한 아찔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새기게 되었다. 오늘처럼 작은 것에서 얻는 행복이 더 눈물겹고,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는 날이면 가슴 한편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다.

우리가 살면서 꿈꾸는 '행복'이란 어쩌면 이렇게 사소한 일들로 우리의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다. 반나절을 헤매도 찾기 힘들었던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해 수많은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녔던 기억은 모두의 공통분모일 것이다. 그렇게 무심히 밟고 지났던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소리 없이 찾아왔던 행복의 손짓을 외면한 채 행운과 기적만을 찾아 욕심을 키웠던 것 같다.

지천명의 고개를 훌쩍 넘고 있다. 하늘의 뜻을 알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라는 나이다. 작은 일에 안달하고 욕심을 부린다고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쯤은 이제 조금씩 알 것 같다. 혹여 아픈 상처가 있다 한들 삶의 굳은살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무심히 떨궈지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지는 게 인생인 듯하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그래, 이만하면 감사하고 살자'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가도 가끔 인생이 쓰고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를 또 마주할 것이다. 꾸역꾸역 욕심이 차오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안분지족'의 교훈을 꺼내 곱씹으면 새록새록 단맛이 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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