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윤희 충북수필문학회장·전 진천군의회 의원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내려다본다. 올 한해도 갖가지 일들을 견뎌내느라 다소 힘겨워 보인다. 그래도 저벅저벅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한 발걸음에서 무던함과 저력이 느껴진다. 세월을 떠안고 가는 힘이다.

동그라미, 가위표, 빼곡하게 사연을 적어놓고 마음에 든다, 들지 않는다. 말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틈새를 비집고 2년여 계속되는 코로나19는 변이를 일으키며 눌어붙을 심산인가 보다. 완화되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다시 강화되고 있다. 부정적인 인식은 용케 알고 엉겨드는 병원균이다. 삼가고 조심했더라면 쉬 이겨냈을 것을 너무 나부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상은 돌아간다. 사람이 우선한다는 진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도 헤쳐나갈 힘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바이러스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친 긍정적의 힘으로 막아낼 수 있는 문제다. 각자의 자리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긍정의 힘 아닌가 싶다.

오래된 미장원 하나를 만났다. 높은 빌딩이 들어선 혁신도시 뒤켠, 구도심에 머물러 있다. 새댁 때 문을 연 미장원이 세월과 함께 노랗게 익어 이제는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된 곳이다. 근 60년 세월을 지켜온 일터, 가을볕에 농익은 금잔디가 따듯해 보인다.

출입문 앞에 어르신들이 밀고 다니는 유모차가 2대 받쳐 있다. 보나 마나 손님은 둘일 것이다. 밖에서 간판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더니 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는 주인어른의 얼굴이 예상외로 곱다.

곱게 나이 먹은 원장님을 보고 사진 한 장 찍게 모델이 돼 줄 수 있냐 하니 사진 찍을 준비가 안 되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아무렇게나 하고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올해 여든을 넘긴 나이지만 천생 여자다. 평생 미용업에 종사해 왔기 때문인지 미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다.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여성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다.

예상했던 대로 두 명의 손님은 모두 할머니다. 한 명은 이미 롤을 다 말아 머리에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뒤로 물러앉아 있다. 또 한 분은 이제 막 머리에 롤을 감고 있다. 말이 미장원이지 전면에 붙박이 대형 거울 앞에 의자 서너 개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느 가정집 같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 할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하다.

김윤희 수필가·충북문학수필회장
김윤희 수필가

머리 감는 곳이 예스럽다. 옛날 부엌의 부뚜막 개수대처럼 되어 있다. 그 옆에 물 뿌리는 조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손님이 머리를 감기 위해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조리로 물을 뿌려가며 감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식 미용실에서 눕는 형태와 반대의 모습이다. 고졸한 분위기가 정겹다. 할머니들의 구순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수천 년 역사를 지켜온 힘이다. 그동안 어려운 일, 아픈 사연이 왜 없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쓸어 덮으며 오늘을 지켜온 건 무던한 마음이다. 긍정의 눈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민심이었음을 낡은 달력에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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