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1960~70년대 어렸을 때 개미와 얽힌 추억이 참 많다. 산은 물론 길거리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땅바닥을 줄지어 가는 개미들을 따라가 끝내 땅속 개미집을 헤집다가 개미에 팔뚝 등을 물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행군하는 군대처럼 대열에서 이탈 없이 일렬로 부지런히 기어가는 개미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일부 악동들은 개미들을 발로 짓밟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했다. 야산에서 전쟁놀이하다 솔잎 불개미 집을 건드려 온몸을 개미에 물린 적도 있다. 개미가 몸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거시기를 물어 소변에 무척 애를 먹기도 했다. 불개미가 약이 된다 해서 어른들이 삽으로 퍼서 자루에 채집해 끓여 먹거나 개미 주(酒)를 빚어 마시기도 했다. 그 약효에 대해서는 의학적으로 확인해 볼 일이지만 말이다.

개미는 개밋과 곤충이다. 1억 1천만여 년에서 1억 3천만여 년 전 백악기 중반에 꿀벌과 비슷한 조상에서 진화하기 시작해 지금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지구상 1만2천~1만4천여 종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개미를 한낱 미물(微物)의 곤충이라 치부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무리를 이뤄 조직적으로 생활하는 군체(群體)를 이루는 '진사회성(eusociality)' 동물로 그 위상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어미 이외에 새끼를 양육하는 개체가 존재하고 번식에 관한 개체 간의 소통과 함께 분업을 이루는 동물이다. 마치 의사소통과 사회구조로 이뤄진 인간 사회처럼 말이다.

개미에게는 다른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더욱 신기하고 특이한 점이 있다. 두 개의 위를 가졌다는 거다. 소 등 되새김 동물은 무려 4개의 위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 기능은 각각 다르다. 양분으로 흡수하는 진짜 위는 오로지 하나다. 위선이 분포된 넷째 위, 주름위(abomasum)다. 나머지 3개 위(혹위, 벌집위, 겹주름위)는 주름위를 위한 보조에 불과하다. 개미의 위 두 개는 기능이 같다. 영양분이 흡수되도록 다른 위를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위액을 분비하는 소화기관이다.

왜 개미는 다른 동물, 특히 동물 분류상 절지동물 곤충강(綱)에 속하는 소동물과 다르게 위가 두 개일까? 독식(獨食)하려는 욕심일까? 아니면 태생적으로 대식(大食)증에 걸렸기 때문일까? 욕심도 아니고 대식증 때문도 아니다. 굶주린 동료를 만나면 두 번째 위에 비축해 놓은 영양분을 토해 먹이기 위해서다. 동료를 위한 두 번째 위가 이른바 '사회적 위'다.

개미의 먹이는 진딧물의 분비물이다. 개미는 진딧물의 배를 더듬이로 건드려 분비물이 나오게 한다. 이 분비물을 두 개의 위에 각각 저장한다. 첫 번째 위의 분비물은 자신 에너지원으로 사용한다. 나머지 위의 분비물이 굶주린 개미들에게 주어지는 먹이다.

개미는 한자어로 '의(蟻)'다. '벌레 충(蟲)'과 '의로울 의(義)'의 합성어다. 글자대로 해석하면 '개미는 의로운 벌레'다. 개미가 곤충이니 '蟲'이 들어간 것은 이해되지만, '義'가 들어간 것은 다소 의아하다. 개미가 인간처럼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단 의미인가? 한자어가 주로 삶의 철학과 자연의 섭리 그리고 주체 특성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고려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蟻'는 '뜻을 나타내는 '蟲'에 '소리를 나타내는 '義'가 합해진 형성 문자다. '義'는 소리 수단에 불과해 별 의미 없다. 하지만 두 개의 위를 가졌다는 점과 '義'를 연결해보면 심오한 의미가 담겼다.

개미가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춘 동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네 가지 마음가짐인 어짊(仁), 의로움(義), 예의(禮), 지혜(智) 말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동료를 측은하게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으니 인(仁)이다. 혼자 배불리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으니 의(義)다. 동료를 배려하고 양보하고 공경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있으니 예(禮)다. 마지막으로 조직적인 무리 생활을 위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으니 지(智)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개미는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늘 목전의 이해 관심에 눈이 충혈되어 있다. 승자독식에다 희생정신의 실종 시대에 살고 있다. 극도의 이기주의와 취약한 공동체주의 팽배에다 비공식적, 정적인 인간관계가 부지불식간 소멸하고 있다. 인간 사회의 결속 강도는 너무나 약하고 치밀도 역시 느슨하고 엉성해서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한마디로 자신을 뒤돌아보거나 이웃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의 타이틀이 무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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