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잎새 떨어뜨린 나무들이 깊은 침묵에 들어있다. 묵언 중인 수행자 같다. 봄여름 가을 창밖으로 색채를 달리해서 눈을 호강시켜주던 산은 온갖 소란스러움 훌훌 떨쳐내고 단출한 풍경이다.

모처럼 걷고 있다. 전날 내린 눈이 쌓여있다. 쌀쌀한 날씨에 아무도 밟지 않은 숫눈을 밟으며 발밑에서 자지러지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 뽀드득 소리가 마치 우주의 소리를 듣는 듯 좋다. 순백의 세계와 풀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고즈넉한 명상에 잠기게 한다.

거침없이 하늘길 뻗던 가지들이 산마루에 드러나 있다. 빈 가지 사이로 바람이 드나들겠다. 제멋대로 뻗은 것 같은데 좌우 대칭이 맞고 안정적인 가지. 이리저리 구부러진 선을 보며 누구의 작품인지 신비스럽다. 텅 빈 나뭇가지를 벗어난 눈이 산기슭에 쌓여있다. 오리 몇 마리 헤엄치는 저수지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배경으로 멋스럽다.

나무들은 미련 없이 다 떨구고, 나목이다. 참나무는 잎을 놓지 못하고 색 바랜 잎을 매단 채 앙상하게 떨고 있다. 버려야 비우는 것을, 새삼 내 모습 같아 다시 한번 바라본다.

덧없이 한 해를 보낸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잊고 또 누군가에게 잊힌다는 것은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내는 것과 같이 쓸쓸하다. 12월 달력을 얼른 떼어내고 새 달력을 걸며 기대와 희망을 걸던 시절보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묵은 달력을 떼어내지 못하고 뭔가 할 일 다 못한 아이처럼 조바심이 난다.

자세히 보면 나무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꽃눈을 매달고 바람을 맞고 있다.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늘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뿌리에서는 물을 올려야 하고 잎겨드랑이에서는 내년에 피울 잎눈과 꽃눈을 미리 만든다.

자작나무가 빛바랜 나무들 사이에서 나신(裸身)으로 서 있다. 온통 흰색으로 마음이 하얘지는 나무다. 초록빛 찬란한 계절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잎새 다 떨어뜨린 나무들 사이에서 소나무도 돋보인다. 사시사철 푸르니 추운 겨울에도 여전히 초록이다. 나는 소나무처럼 언제나 한결같았을까 싶다.

글을 쓸수록 작가는 생각을 더 깊게 해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늘 겸손해야 한다는 교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잎이 무성하고 열매 풍성한 소재라도 모든 치장을 벗어던진 한 그루의 겨울나무와 같이 수필을 써야 한다는 말씀도 들린다. 군더더기는 버리고 기둥과 큰 가지만을 나타내야 한단다.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을 쓰기가 어디 쉽던가. 잎도 달고 싶고, 곁들여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게 하고 싶어서 자꾸만 치장한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겨울 숲에 나무가 있다. 모든 걸 내어주고 한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다. 매서운 추위와 바람 속에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움을 틔운다. 저 큰 나무도 하나의 씨앗에서 자라면서 단단하게 안으로 응축시켜 한 줄의 나이테를 완성해간다. 비록 칼바람은 맞지만 향기로운 결을 아로새긴다. 숲에 들어오니 겨울 숲도 조용하지는 않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고 새들이 왁자지껄하다. 노란 껍질 속에 빨간 열매를 매단 노박덩굴 가지가 소란스럽다. 잎을 떨군 비움의 선으로 바람을 탄다.

해거름 노을이 아쉬운 나이다. 가는 세월을 붙들고 싶어 마음속에 노을빛 풍경을 다시 그려 넣기도 한다. 마음이 시림은 언제나 슬프다. 몸이 시리면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시린 마음은 늘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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