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화려함을 자랑하던 금수강산이 어느새 다 벗어 제치고 육체미를 자랑한다. 그야말로 북풍한설을 견디며 근육자랑 하는 품새가 미스터 경연대회장 같다. 내면에서는 봄에 움을 틔우기 위한 작업장이 되어 바쁘겠지. 하지만 우리네는 실속 없이 바쁜 12월이었다. 대선이 얼마 안 남았지만 후보들의 정치 철학은 깜깜이고 흠집잡기 바쁜 세상 돌아보기도 싫다. 그나마 예술인들이 미술, 사진 등 전시회로 시작해서 음악회 창작무용 발표회까지 송년 무대를 품격 있게 빛내주니까 12월의 체통을 지킨 것이다.

공연히 들뜬 기분으로 어디든 떠나고 싶은 친구들 몇몇에 묻어서 2박 3일 예정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하자마자 군것질이 시작되는가하면 별로 우습지 않은 내용에도 하하호호 웃고 싶어 그동안 어찌 참았을까 싶다. 틈틈이 누군가의 뒷담까지 해야 하는 경로우대 여인들의 입이 제일 바쁘다. 모이면 양념에 마늘처럼 꼭 뒷담이 들어가야 흥미로워지는 것은 남녀가 따로 없다. 그 험담이 위험수위에 다다를 때쯤에 잘라버리고 내가 나섰다.

"쥐부리글려가 무슨 말인지 알아?"했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뭐라고?"해서 "쥐 부 리 글 려" 한마디 씩 또박 또박 말해줘도 그런 말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뒷담 분위기를 바꿔보려다가 또 가르치는 근성이 나와 버렸다.

"옛날 궁중에서 어린 생각시(수습나인)들에게 궁중 법도를 가르치는 교육인데 그 첫 번째가 입조심이래. 허투루 지껄이는 말단 내인의 말 한마디로 대궐 전체가 발칵 뒤집히는 사고도 심심찮게 있어서 말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나란히 세워 놓고 내관들이 장대 끝에 불을 붙여서 그 어린애들의 입에 가까이 들이밀면서 지질 듯 겁을 주는 거야. 그만큼 입조심이 궁중 생활의 으뜸이라는 의미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하려면 첫째도 둘째도 입조심이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여."했더니 "그렇긴 그려"하면서 모두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사실 다음에 자신이 빠지면 그때는 자기 뒷담 할 것 아니냐고 이제 우리 이 자리에 없는 친구에 관해서는 칭찬이든 험담이든 일체 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이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덕 대게를 맛나게 먹고 기분 좋게 숙소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작이다. 누가 말리랴.

다시 옛날이야기 하듯 궁녀 이야기를 꺼냈다. "있잖아 궁녀가 되려면 숫처녀라야 되는데 신체검사를 어떻게 했는지 알어?" 다들 관심은 최고조가 됐다. 그냥 오늘은 궁녀들의 인생을 화두로 삼아볼까 맘먹었다. 그 검사는 재미없고 간단하기 때문에 설명도 간단하게 했다. "앵무새 감별법이라고 해서 팔에 앵무새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서 또르르 흘러버리면 남정네의 정액이 스민 몸이래." 숫처녀는 팔에 묻어 떨어지는 것이 없단다. 간단하게 설명하고 무심코 넘기든 글씨체 궁체를 이야기했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나는 무엇보다 궁체를 생각하면 그 시대여인들이 지켜야할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느낀다. 오래 전 김진세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가슴이 먹먹했다. 궁체는 생각시들의 수련 과정 중 하나일 뿐이 아니다. 그 글씨는 개성이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된다. 붓의 끝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까지 정숙, 정성은 물론 충성심과 온화한 여성미를 잃지 말아야 된단다. 수습 나인들에게 살고 싶으면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어라 교육 시키듯 글씨를 연습하는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글씨체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궁녀들의 교육과 훈련으로 다듬어진 그 글씨체 궁체여야 했다. 그 후 누군가 궁서체에서 품위를 느낀다는 말에 나는 선 듯 동의를 못했다. 수습나인들의 붓끝에서 묻어난 온화스러운 품위라고 생각하면 될 터이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 노력까지 숭고하게 생각해야겠다고 맘 고쳐먹고 나니 궁체라는 글씨체에서 비로소 정성과 품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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