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모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베란다 창을 두드린다. 문을 열고 들어오겠다는 건지, 문을 열고 내다보라는 건지. 헤살헤살 웃고만 있다.

햇살에 이끌려 요 며칠 추위 핑계로 닫혀있던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풀빛 가신 아파트 화단에 까치밥으로 매달려 있는 몇 알의 감이 눈에 띈다. 찬 바람 마른 가지 끝에서 이름값을 치러내고 있는 그 모습이 아릿하다.

겨울 이맘때면 짚풀을 깐 소쿠리에 가지런히 대봉감을 챙겨주시는 친정어머니. 굽은 허리 겨우 펴 따낸 감을 자식들에게 고루 배분하는 일도 어머니에겐 김장에 버금가는 겨울 채비 중 하나이다. 가지런히 펼쳐진 짚풀 위에서 익어가는 홍시를 골라 먹는 풍경은 겨울만의 묘미다. 어머니의 홍시는 그렇게 긴 겨울 쏠쏠한 간식거리로 허기와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팔순 넘긴 노모의 바쁜 손길은 비단 감에서 그치지 않는다. 손수 캐 다듬고 씻어 무친 봄나물에서부터 한여름 볕에 잘 영근 감자며 고구마, 약 주지 않고 키웠다는 허리 굽은 오이며 가지. 겨우내 뽑아 먹을 파 심은 화분까지. 때를 따라 보내주시는 제철 푸성귀들은 사시사철 내 곡간과 마음을 가득 채워왔다.

이제는 흙에서 손을 놓을 때도 됐건만, 자식들 손에 뭐 하나라도 챙겨주는 게 낙이라며 일을 놓치 않으신다. 그러다 덜컥 탈이 났다. 어깨통증을 호소하시길래 병원엘 모시고 갔더니 힘줄이 다 파열돼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이라 했다. 되도록 팔을 쓰지 말아야 하니 농사일은 접으라는 게 의사의 처방이었다.

힘든 일 그만하시라고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도 어머니의 손 이끌고 병원 문 앞도 제대로 안 가본 무심한 딸이 돼버렸다. 몸이 그 지경이 되도록 살펴 드리지 못한 자책에 마음이 아팠다. 부끄럽게도 손댈 수조차 없게 된 그 몸 앞에서 뒤늦은 사랑을 되짚고 있다.

나이가 들며 어머니에게 빚진 마음은 커갔지만, 정작 갚으려는 마음의 엄두를 못 내고 살았다. 평생 자식 바라기로 살아오신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며 그 흔한 '사랑해요', '감사해요'라는 표현 한 번 제대로 못 했던 게 사실이다.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사랑도 내리흐르는 것이려니 하며 산 탓이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되짚어 보면 매 한번 없이 우리 5남매를 품고 다독이며 키워 낸 인내와 헌신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가! 내 새끼 품고 사느라 애면글면하는 동안 아직도 그 자리에서 여전히 탯줄을 당기시는 그 이름. 쇠해져 가는 몸으로 '친정엄마'라는 이름값을 치러내고 있는 모습이 까치밥 품은 마른 감나무처럼 바스락거린다. 익어가는 어머니의 홍시를 볼 때마다 매번 놓쳐 버린 말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울먹거려온다.

짚풀 위 잘 익은 홍시 한 입 베어 물며 옹알이하듯 되뇌어본다.

'사랑해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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