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시내에 일이 있어 나갔다가 청주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무심천이 흐르는 아랫쪽으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이 문득 일었다. 잠시 갈등하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 내려섰다. 무심천과 그 너머 우암산이 조화롭게 잘 보이는 곳에 섰다. 사진을 찍었다. 페북에 아래처럼 포스팅하며 사진을 붙였다. 걷다가 무심천으로 내려선다. 그 너머 우암산이 보인다.

독일 하이델베르그엔 네카 강이 흐르고 그 너머 산엔 철학자의 길이 있다. 괴테는 사랑에 취해 네카 강변을 거닐고 헤겔, 야스퍼스는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강 또는 천이 흐르고 산이 있다. 단순한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에 문화, 예술이 붙든, 생활이나 명소, 유적지가 붙는 건 부가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부가는 멋드러지고 폼나곤 하지만 본질 내지 바탕은 누추하고 소박하고 겸허할 수 있다. 또한 바로 그런 것들이 본질 내지 바탕의 힘이다.

본질 내지 바탕이 허(虛)나 공(空) 아닌 색(色)이라면 그 위에 색(色)들이 들이찬들 폼이 나겠는가. 색이 색처럼, 문화나 예술처럼 보이겠는가. 바탕인 허(虛)나 공(空)은 이미 색의 잠재나 은닉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눈 앞의 무심천, 우암산이나 오래 전 다녀온 네카 강, 철학자의 길이건 노화가 되어가는 내 눈에 아주 판이한 것도 아니다. 작은 도랑 하나 집 앞에 흘러가는 것만으로 저 도랑에 종이배를 띄우면 어디까지 가려나 어린 나는 미지의 상상을 품곤 했다.

봄 기운이 약간 쌀쌀한 바람 속에 꽃씨처럼 머금어 있다. 네카 강 너머 아니지 무심천 너머 뚝방에 즐비한 벚나무들은 겨울 내내 닫아놓은 뿌리의 수문을 벌써 열고 물의 터빈을 돌릴 것이다. 억지 내지 과장이 곁들여 있다. 쓰면서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그렇게 했을까.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지 못한 데에 따른 결핍감. 그에 따른 투사. 평소에도 우리나라에 철학이 빈곤함을 느꼈는데 그로 인한 갑갑증과 어설프게라도 엮어 표현하고 싶은 마음. 네카 강과 철학자의 길이 흐르는 하이델베르그. 그 낭만과 서정. 그것을 읊조리면서 돋보이고 싶은 치기도 있을 것이다.

글에 어설픔이 있는만큼 댓글 반응이 궁금했다. 의외로 조회수가 많은 편이라서 당혹감이 왔다. 엉거주춤하고 정확과 면밀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이런 글이 호감을 준단 말인가. 사람들 역시 내가 포스팅을 하게 된 동기들과 교감이 되고 통하는 지점이 있는 걸까.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그 부분이 가려웠다. 이성에 흔들림 없이 논리정연하게 한 포스팅. 시사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있게 천착한 글. 나의 그런 것들이 대개 주목 받지 못함에도 당혹감이 왔었다. 내 딴에 심오함을 담은 포스팅도 외면당하듯 했다. 페친들로부터 어떤 포스팅이 주목받는지를 따지려는 글이 아니다. 내게 있는 엉뚱함. 글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모호함. 나만의 어설픈 색채에 사람들의 마음이 잠시나마 머물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로 잰듯한 것도 아니고 의미 심장도, 뻔한 즐거움도 아닌 모호한 지점. 나뿐 아니라 사람들의 낯설고 독특한 그 시공간이 다른 사람들이 마음의 닻을 슬쩍 내려놓는 곳일 것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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