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나의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입주자가 있는데 알려줘도 되냐고 묻는다. 이유를 물었다. 전날 전기차 충전문제로 내가 이웃에게 실수를 했다고 한다. 그 입주민이 이유를 따지기 위해 내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한단다.

가능성 있는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한 가지 집히는 데가 있다. 전날 퇴근하면서 전기차 충전하려고 아파트 충전소로 갔는데 모든 충전기 주차장이 만원이었다. 그중 충전은 하지 않고 그냥 충전기만 꽂혀 있는 차량을 발견하였다. 얌체족이다. 그를 불러 주의를 주고 이동주차를 요구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참았다. 나는 관대하니까.

충전기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한 후 얌체족 차에서 충전기를 뽑았다. 케이블을 최대한 당겨 간신히 내 차에 꼽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전기차는 아직 충전 인프라가 모자라 제때 충전하지 않으면 내연기관 차량에 비해 큰 불편을 감수하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전기차주들간 충전 매너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관대한 나에게 따지기 위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고? 어이가 없었다. 그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라고 하였다. 전화가 오면 엄히 꾸짖을 생각이었다. 전화를 기다렸다. "Manners maketh man.(매너가 사람을 만든다)"이라 속삭이며 악당들에게 참교육을 시전하는 '킹스맨' 콜린퍼스에 빙의하면서...

이내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 미루어 나이가 짐작됐다. 끽해야 30대 중반. '풋~ 애송이구나'. 그는 '나중에 충전하려고 미리 충전기를 꽂아두었는데 왜 무단히 뽑았냐'고 따졌다.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다. 반면 나의 논리는 단순명료했다. '현재 충전하고 있지 않은 전기차는 충전소에 주차할 수 없다. 그러니 사과하라.' 그는 당황해 하면서 본인의 주장만 반복할 뿐이었다. 홀드온, 대기, 심야전기... 대체 무슨 말인지...

나는 킹스맨에 빙의된 채로 격조있지만 단호한 대응을 했다. 나의 초지일관한 대응에 그는 더욱 당황해 했다. 결국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마침내 나의 사과 요구에 굴복했다. 겨우 안정을 찾은 듯한 그는 '불편을 끼쳐서 죄송하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끊으면서도 그는 마치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혼잣말했던 것처럼 '심야전기... 홀드온...'이라는 단어들을 말끝에 붙였다. 누가 봐도 마지못해 하는 수긍이다. '매너에 대하여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 줘야하나?' 킹스맨 본능이 꿈틀댔지만 그의 흔쾌하지 못한 사과를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신사니까.

그런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갈릴레오의 혼잣말 같은 그의 말과 나의 흐릿한 기억이 내 안에서 어떤 논리로 점점 형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강한 각성의 순간이 내게 왔다. 영화 식스센스에서 순간적으로 오히려 자신이 유령이었음을 자각한 브루스 윌리스처럼.

충전기에 '홀드온'이라는 기능이 있어 대기하다가 충전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아도는 '심야전기' 활용을 위해 오히려 권장된 기능일 수도 있다... 충전기에 충전중이란 표시는 없었지만 영어로 'HOLD ON' 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 등이 마치 흑백 영화 필름이 지나가듯 뇌리를 스쳤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나의 각성이 맞는지 확인했다. 과연 충전기에 심야까지 대기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는 계속 그 기능을 설명했지만 내가 막무가내였던 것이다. 솔직히 'hold-on'이 '대기'의 영어표현인 것도 몰랐다. 다행히 그는 내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기분 풀었다고 한다. 오히려 나의 뒤늦은 각성이 고맙다고 한다.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무식했다. 그래서 용감했다."는 나의 뒤늦은 사과를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화를 끊고도 미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에게 커피세트 기프티콘을 보냈다. 다시 진지하게 사과드린다는 문자와 함께. '안주셔도 되는데 주시니 감사히 받겠다'는 답장이 왔다. 예의바른 분이다. 지금생각해도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나의 편협함이 창피하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벽창호의 꼰대질을 참아준 이웃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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